경복궁 공사에 공사실명제

이노근(노원구청장)

시민일보

| 2006-12-27 18:43:51

이 천객은 두 궁중화(宮中畵)로부터 뜻 밖에 그러한 놀라운 천손미학(天孫美學)을 발견했다. 따라서 대원군이 기도한 경복궁의 품계는 왕궁(王宮)이 아니라 황궁(皇宮)일 거다.

그러나 이 천학은 근정전의 학습범위를 거기서 도저히 만족할 수가 없다. 근정전 코드를 몇 개 추가하여 그 미학을 더 발굴해야겠다.

우선 최근 근정전 해체복원 과정에서 상량문(上樑文)이 나왔다고 하는데 과연 그 내용은 무엇일까?

“그 상량문은 2001년 1월 18일 근정전 위층 종도리 아래쪽에서 발견되었어요… 글씨는 폭 77cm 길이 13.5m의 붉은색 명주(明紬)천에 먹으로 썼어요.”

바로 그 상량문에 경복궁 복원이유를 이렇게 공시(公示)하고 있다.

‘태평세월을 맞이하여 천지(天地)가 다시 생동(生動)하고 아침 해가 오르니 경복궁을 다시 세워 한양에 수(繡)놓고자 한다!’

그러나 현대판 우중(愚衆)들이 진정 역사교훈으로 접수해야 할 구호는 그러한 정치적인 수사(修辭)가 아니다.

진지한 답사꾼이라면 경복궁 공사실명제(工事實名制)를 마땅히 경하해야 한다.

현대판 인간들이 성수대교가 무너지고 나서야 그 수습방안으로 공사실명제를 부랴부랴 실시하고는 온갖 호들갑을 떠는 일이 있었는데 사실은 이미 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당시에 창안(創案)한 것이다.

“바로 그 증거가 영건도감감동도제조(營建都監監董都提調)이지요… 폭 36.5cm 길이 79cm 흰색 명주 천에 도제조, 서리, 아전, 목수, 석공 등 공사참여자 156명의 명단과 그 직책이 기재되어 있어요… 조두순(趙斗淳)과 김병학(金炳學)이 공동으로 도제조(都提調)였다고 해요.”

그러나 근정전 답사에서 우리는 그 궁궐의 치욕과 수모도 함께 감수(甘受)하고 가야 한다.

일제강점기 후한 무치한 조선총독(朝鮮總督)의 무례가 그것이다.

‘1915년 경복궁에서 조선물산공진회가 열렸다… 때마침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근정전의 의장물을 구경하다가 능청맞게 불쑥 어좌(御座)에 앉아버렸다.’


아마 조선왕조가 탄생한 이래 처음 있는 불상사 일거다. 아무리 백 번 생각해 봐도 조선의 체통을 무례하게 구겨놓은 행패임에 틀림없다.

세칭(世稱) 대일본 조선총독이라면 근정전 용좌(龍座)는 임금 이외에는 어떠한 경우에도 좌정할 수가 없다는 것은 알만도 한데 말이다.

근정전의 세 번째 화두(話頭)는 황제와 왕이 무엇이 다른가에 그 초점을 맞춰야 할 거다. 두 개념차이를 실감 있게 판별하기 위해서는 역시 상투적이지만 몇 가지 연구가 필요하다.

‘황제는 왕(王) 중 왕(王)이다… 조선은 왕국(王國)이고 청나라는 황제국(皇帝國)이다… 이것은 조선이 청나라의 제후국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군신(君臣)의 예(禮)로 대접해야 한다.’

사실 고종실록을 보면 고종은 1897년 10월 12일 원구단에서 대한제국 황제로 즉위하였는데 그 후부터는 황제의 예법에 맞게 그 호칭·연호·의전 등 모두를 바꿨다.

“고종이 황제로 등극한 후 건양(建陽)이라는 황제국 연호(年號)를 쓰기 시작했으며… 국왕 전하(殿下)가 황제 폐하(陛下)로… 과인(寡人)이 짐(朕)으로…왕후(王后)가 황후(皇后)로… 세자(世子)를 황태자(皇太子)로… 천세천세천천세가 만세만세만만세로… 교서(敎書)가 칙서(勅書)로… 각각 바꿔 사용했어요.”

고종실록을 보면 의정대신(議政大臣) 심순택은 원구단에서 고종황제 즉위식을 마치고 그 소감을 이렇게 피력하고 있다.

‘참으로 상전벽해(桑田碧海)의 감회를 누를 수가 없구나.’

중국과의 외교문서 호칭에도 신조선국왕(臣朝鮮國王)을 버리고 대한제국 황제(大韓帝國 皇帝)로 바꿔 사용하게 된 거다.

그런 의장격식(儀仗格式)은 군주가 죽어서도 아주 후하게 대접을 받는다.

‘왕릉(王陵)은 석물(石物)이 양과 호랑이지만… 황릉(皇陵)의 호석(護石)은 기린·코끼리·해치·사자·낙타·말 등 여러 석수(石獸)가 등장한다.’

실제로 남양주시 소재 고종·순종 황제의 능 홍유릉(洪裕陵) 배치를 잘 보면 왕릉과 천양지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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