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계의 참회를 보는 눈

이 태 복(前 보건복지부 장관)

시민일보

| 2007-10-21 15:42:41

봉암사 결사 60주년을 계기로 불교계 안팎에서 자정과 참회의 목소리가 높다. 봉암사 결사는 광복 이후인 1947년에 젊은 스님들을 중심으로 참회정진을 하기로 뜻을 모으면서 승풍과 절집의 풍토를 크게 쇄신할 수 있었고, 조계종단을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종단으로 만들었다.

청정도량을 만들기 위한 전통적인 불가기풍의 진작은 바람직한 방향이었다. 하지만 사바세계의 대중과 더불어 고통과 기쁨을 나누는 실천적 수행이 소홀히 되면서 급속한 도시화와 시장경제의 범람에 대처하기 어려웠다. 한문식 경전을 여전히 암송하고, 자기만족적인 참선방식만을 고수하거나 거꾸로 민주적인 정치를 종단지도체제나 교구본사 선거과정에 도입하면서 각종 파벌 난립에 몸살을 앓게 되었다. 아무런 기준도 없이 종단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해 전개하는 권력투쟁은 마침내 정치판 이상의 정치꾼 스님들을 만들었다. 특히 본사 주지임명권을 총무원장이 행사하게 되면서 불전을 서로 차지하려는 싸움은 노골적이고 추악한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기 때문에 신정아 사건으로 불거진 불교계의 갈등과 마곡사 사건 등이 터져 나오면서 용맹정진을 무엇 때문에 했고, 참선을 통한 깨달음은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물론 이런 사태는 절집운영에 관련된 사판승(事判僧)에 속한 일일뿐, 선방이나 공부하는 스님들과는 분명 먼 얘기이다. 하지만 선승이었다가 사판승이 되고, 이들이 다시 학승이 되기도 하는 것이 현실이므로 딱히 그 세계를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한 지도 모른다. 또 이런 추문은 비단 불교계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종교계 전반에 걸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불교의 조계종이 출가의 전통 위에 서 있으면서 국태민안을 기원하고 자신을 버리는 수행을 통해 진실을 찾아가는 한국사회의 소중한 집단이라면 이번 사태를 통해 새로운 출발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 수행과 참선을 따로 나눌 것이 아니라 상구보리와 하화중생(下化衆生)하는 과정을 각종 프로그램과 단계에 적용해 ‘살아있는 부처님’을 키워나갈 것, 둘째, 총무원장과 종정의 역할과 직분을 다시 조정하여 천주교식의 종단 최고대표자의 권위와 권한을 확립하고, 지도력을 세워나갈 것, 셋째, 교구, 본말사의 재정의 투명성과 합리성을 확보하기 위해 종단 차원에서 일정한 규칙을 제정하고 이를 준수하게 할 것, 넷째, 승가전통에 위반한 각종 일탈행위에 대해 단호한 규율을 수립할 것 등이다.


불교계의 문제는 그렇다 치고 내가 속한 민주화세력의 참회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가. 5.31 지방선거에서 드러난 심각한 민심이반에 대해 누구를 불문하고 참회와 반성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해왔는데, 그 성과는 별로 없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첫째는 국정실패의 책임 있는 세력들이 진정한 반성을 통해 국민들의 갑갑한 현실을 움켜잡고 풀어나가면서 희망의 불씨를 피워나가야 했는데, 오히려 참여정부의 성과를 계승해야 한다고 우기고 있으니 국민들 가슴이 싸늘할 수밖에 없다. 둘째는 이른바 범여권에 속한 정치권과 재야인사들이 참회를 통해 국민의 고통을 껴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기보다 권력을 빼앗길 수 없다며 신장개업을 하거나 자신들만의 잔치를 국민의 이름으로 치장하는 선거공학에 몰두한 것이 전부였다. 국민들이 그들을 외면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셋째, 책임이 있든 없든 국민들 속에서 먹고사는 문제를 풀면서 국가위기 극복을 위한 캠페인을 전개한 세력은 소수였고, 아직 전체 국민들 속에서 감동의 물결을 일으켜 세우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 참회는 실패한 것인가. 아니다! 불교계의 자정과 쇄신의 노력과 마찬가지로 민주화세력들도 철저한 자정과 피눈물을 흘리는 참회가 있어야 거듭남도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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