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전(神機箭)
이 태 복 (전 보건복지부 장관)
시민일보
| 2008-09-10 18:26:07
오랜만에 아내와 함께 영화를 봤다. 소재도 신선하고 스토리 구성이나 영화적 상상력이 근사하고 내용도 있는 작품을 고르다보니 신기전(神機箭)에 관심이 갔다. 신기전은 기대했던 대로 웃음과 통쾌, 그리고 눈물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한 작품이었다. 한국과학사에서 소재를 찾았지만, 신기전 속에는 지난 수천년 우리 겨레의 가슴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상처를 들쑤시고 헤집어내어 팽팽한 긴장을 요구하고 마침내 통쾌하게 터뜨리고 만다.
김유진 감독은 우리 역사의 깊은 상처에 대해 그동안 내재화된 금기어로 덮어온 ‘힘의 논리, 강대국과 강한 자에 대한 순응의 철학’에 맞서 당당하게 나설 것을 촉구한다. 이 내재화된 금기어가 6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위력을 떨치고 우리 국민들을 옥죄어 왔다. 그 결과는 잃어버린 역사와 잃어버린 지리적 공간 속에 강한 자, 승리한 자의 역사와 문화만을 집어넣고 이를 자기 것으로 숭배하도록 강요해왔다. 아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자기나라의 대표적인 작가들로부터 남의 역사를 번안한 소설과 자기역사를 부정한 역사서를 읽고 풍부한 교양이라 생각하고 쌓는다. 공적인 교육과정에서조차 자기 음악, 건축, 미술, 과학보다 과거에는 중국의, 오늘날에는 서양과 미국의 문화에 익숙해지도록 길들여진다. 외세의 숱한 침략에 따른 패배와 죽음의 공포 때문에 이제는 아예 강한 자의 역사와 문화를 자기화함으로써 생존을 보장받으려 한다. 자기족보마저 중국 성씨로 만든 집안이 한둘이 아니다. 우리들이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받아온 교육과 문화를 되돌아보라! 자신의 꿈을 높이 내걸기보다 힘센 자의 색깔로 덧칠해 카멜레온처럼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하면 분명히 떠오르는 그 무엇이 없다. 이런 상태에 놓여있기 때문에 외국으로 나간 한국인 2세, 3세들은 쉽게 모국어를 잊고 강한 자의 현실에 흡수되고 만다. 필자는 이문열씨를 비롯한 한국의 내노라하는 작가들이 ‘삼국지 다시쓰기’에 왜 그토록 열심인지, 그러고도 한 시대의 지성을 대표한다는 작가라는 명찰을 붙이고 있는지 의문이 들 때가 많다. 그들의 후안무치한 ’삼국지 다시쓰기‘나 ’열국지‘가 대문짝만하게 실려있는 광고를 보면 신문을 확 집어던지고 싶어진다. 그렇게 쓸 게 없는가. 참으로 못난 자들이다. 삼국지시대보다 1천여년 앞선 은나라시대를 완전히 중국사로 편입시킨 중국의 역사서 대신에 우리 민족의 원류인 동이족이 하(夏)나라를 뒤집고 은나라(상)를 세웠던 시기의 드라마틱한 소재는 얼마나 많은가. 멀리 갈 것도 없이 당태종과 양만춘의 안시성 전투는 얼마나 많은 상상력을 던지고 있는가. 이땅의 작가라면 마땅히 그 시기 인간의 고뇌와 고통, 기쁨과 슬픔을 찾아내고 기록해야 한다.
영화감독, 작가, 시인, 소리꾼들의 분발을 기대한다. 사회고발적 성격이 강했던 공공의 적, 강철중이나 역사적 소재에서 스토리를 만든 신기전 같은 영화들이 더 개봉되어 국민들이 금기어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자신들의 꿈과 희망을 노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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