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고도 경주

홍문종 경민대학 총장

차재호

| 2009-04-28 18:23:00

천년고도 경주에 다녀왔다.


아니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경주 최부자 댁을 다녀왔다.


경주 최부자 댁에 대한 세간의 칭송은 익히 들어왔지만 직접 방문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개인적으로 연을 갖고 있는 최부자 댁 후손의 일원인 최인환 회장의 청을 받아 경주행을 실행했는데 막상 와보니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여러 번 들 정도로 여운이 남는 여정이 됐다.


몇 번의 짧은 공식 일정 외에는 고교시절 수학여행 차 다녀간 이후 근 40여년 만에 다시 이 곳을 찾은 셈이다.


학창 시절 단골 수학여행지였던 경주는 많은 사람들의 청춘이 추억으로 새겨져 있는 도시다. 나 역시 이곳을 들어서는 순간 수학여행 당시 3박 4일 여정이 바로 엊그제 일 인양 떠올랐다. 서먹함 대신 익숙한 듯한 포근함이 느껴지는 건 인연의 궤적이 그만큼 깊었다는 뜻일까? 도시 분위기도 40년전에 비해 별반 달라진 것 같지도 않았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다. 변한 게 있다면 흑백사진 속 주인공들이 주름 가득한 중년이 되어 인생의 그루터기를 새기고 있는 현실이다.


어찌 보면 천년의 시간을 지나온 도시의 내공이 지난 40여년의 세월 정도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찰나의 순간으로 만들어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최회장께서 들려주신 최부자댁 가문에 얽힌 여러 가지 일화는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많은 가르침과 교감을 주기에 충분한 주옥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알려지다시피 경주 최부자 댁은 조선시대 최고의 부자집으로 우리나라의 대표적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명문가로서 ‘참다운 부자의 표상'으로 기려지고 있는 집안이다. '부불삼대(富不三代), `부자가 3대를 넘기기 힘들다'는 정설에도 불구하고 300여년간 12대 째 만석꾼의 부를 유지했던 독보적 흔적으로도 주목을 받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권불십년의 통설에도 아랑곳없이 사회적 귀감으로 존경받는 명품 부자가문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이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던 차였다.


물론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후손들에게 가문만의 독창적 철학을 담은 가훈 등을 통해 ‘절제의 미덕'을 훈육하고 실천하게 했던 선대에 지혜가 일등 공신이 아닌가 싶다.


부자라고 해서 방만한 사치와 허영을 용납하지 않았다. 며느리에게 삼년간 무명옷을 입힌다는 가문의 전통등이 그것이었다. 오로지 '청렴과 근면'을 바탕으로 도덕적 정당성이 전제된 상태에서 부를 취하도록 했다. 나만 잘 먹고 잘 사는 것보다 이웃과 함께 나누는 공동체 정신의 귀함을 인식시켰다. 심지어 지금도 고택 현판에 흔적이 남아 있는 둔차(鈍次-재주가 둔해 으뜸가지 못함)니 대우(大愚-크게 어리석음)니 하는 선대의 호(號)조차 겸손을 통해 과유불급의 지혜를 상기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담고 있을 정도다.


또한 정경분리를 원칙으로 세운 점도 눈길을 끌었다. 진사이상의 벼슬을 하지말라는 가훈이었는데, 혹여 당쟁에 휘말려 화를 자초해 부를 지키지 못할 가능성을 차단시키는 선견지명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오늘 날 경주 최부자댁에 대해 세상이 갖는 호의나 존경이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겠다.


오늘 이 글을 통해 익히 알려진 경주 최부자댁 명성을 반복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그보다는 칠순의 연배에 접어드신 최회장님이 인생의 후배격인 내게 전해주신 따뜻한 가르침을 함께 나누고 싶다. 최부자 댁 후손으로 살면서 수많은 이들과 교류하는 가운데 그들의 부침을 지켜보면서 느낀 생각인 만큼 귀담아두면 참으로 좋은 약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중 세상을 취하게 하는 세가지에 대해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한다는 말씀이 기억에 남아있다. 술에 취하는 걸 가장 낮은 단계로 친다면 재물에 취하는 건 그보다 더한 중증이고 가장 큰 중증은 권력에 취하는 것이라는 것과 중증일수록 스스로 문제를 간파하고 해결하기가 어렵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셨다. 자각하기도 어렵고 회복 역시 어렵기 때문에 경계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최회장께서는 특히 권력의 핵심에 있다가 비참하게 추락하는 사람을 여러번 겪은 바 있다며 정치권력에 대한 나름의 철학을 귀띔해 줬다.


흔한 말로 정치에 취하면 약이 없다고 한다. 마약이나 도박보다 더 어려운 것을 '정치'로 꼽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에 대한 경계를 가르치는 말씀이었다.


결국은 당사자가 사태의 정확한 판단을 유보한 채 자꾸 패망의 길로 가려고하는 게 문제인 것 같다.


최회장댁에서 식사를 대접받으며 가문대대로 전수되고 있는 최부자댁 손맛을 맛볼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도 이번 여정의 수확 중 하나다. 예전의 그것과 아주 같지는 않겠지만 정갈한 음식에서마저 명문가로서의 최부자댁 고유문화가 담겨있는 것 같아 인상적이었다.


그 중 사연지라는 이름의 김치는 교동을 세거지로 하는 경주 최씨 일족에서 대략 10대째 이어오는 가문의 고유김치로 담백하고 시원한 맛이 일품이었다. 실고추에 버무린 갖은 양념 속을 배추잎으로 얌전히 싸 넣은 것으로 톡 쏘듯 찡한 맛과 소담스런 때깔이 흡사 겨울철 별미 보쌈김치를 연상케 하면서 평소 김치를 좋아하는 나를 매료시켰다. 집장이라는 장도 특이하고 맛이 있었는데, 메주가루를 전구지하고 각종 야채에 섞어서 발효 시킨 집안의 독특한 전통음식이라 했다. 경주 법주도 최부자 댁에서 만들어 팔고 있었는데, 술 맛을 모르는 나이지만 합석한 이들이 이구동성으로 쏟아내는 감탄만으로도 가히 짐작이 갔다.


돌아오는 길에 시가지를 지나다가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고 있는 선거 유세현장과 맞닥뜨렸다. 국회의원을 뽑는 보궐선거와 교육감 선거를 앞두고 저마다 자기 자신 외에는 다른 후보들은 부적격하니 자신을 지지해달라는 내용 일색이었다.


그들에게는 이미 古都의 품격 따위는 안중에 없어 보였다. 오로지 상대를 죽여야 내가 살 수 있다는 생존경쟁의 뜨거운 본능만 있을 뿐이었다.


문득 권력을 향해 치닫는 그들의 모습이 마치 부나비 떼 처럼 보였다.


'나도 한 때 저들의 모습이었을까? 그랬겠지... '


40여년만의 조우였건만 미동도 않는 고도의 침묵이 유난을 자제하게 만들었다.


천년을 버텨온 경주에 있어서는 아무런 의미조차 남길 수 없는 '찰나'에 불과하다는 현실을 깨닫게 했던 것이다. 내게는 인생의 상당부분인 40여년이 결국 찰나처럼 지나간 세월일뿐이고 또한 찰나처럼 지나칠 미래일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더불어 40년 전 내가 꾸었던 꿈은 나의 평가를 받을 수 있지만 앞으로 나의 미래와 행동은 나의 사후에나 이뤄진다는 생각에 미쳤다. 그러고 나니 지금 걷고 있는 발걸음 하나조차도 더 신중한 의미를 부여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을 수 있게 됐다.


그렇게 인생의 무상함과 또 권력의 무상함을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끼면서 깃발이 휘날리는 경주를 떠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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