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홍문종 경민대학 총장
안은영
| 2009-12-06 17:51:49
(홍문종 경민대학 총장)
추사 김정희 선생 동상건립 추진위원회 출범식에 고문 자격으로 다녀왔다.
위원회에 이름을 올리신 면면을 보니 대부분 대한민국 사회를 이끄는 위치에 계시는 분들이어서 앞으로 추진할 사업들이 수월하게 진행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식순에 앞서 진행됐던 특강도 좋았다. 인문학 명사 최완수 간송미술관 학예연구실장님의 추사 김정희 선생에 대한 특강이었는데 평생을 추사 연구에 바쳤다는 명성에 걸맞게 우리들을 사로잡는 강연이었다.
특히 ‘추사’의 오늘날이 당대에 이뤄진 ‘우연’이 아니라는 그의 주장에 관심이 갔다.
조부와 부친 등으로 이어진 명문가 집안의 오랜 학문적 전통과 기량이 몇 대에 걸쳐 완성된 결과물이고 그동안 누적된 조선 성리학을 비롯한 조선 학문의 결정판이라고 강조하는 대목이 인상 깊게 들렸다.
개인적으로도 100% 동의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세익스피어의 본질적 가치를 천재성 하나로만 국한시키기 보다는 그를 담아낼 수 있었던 당시 영국의 국격을 말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왔던 터다.
베토벤이나 피카소 역시 같은 맥락에서 그들의 예술성을 논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위대한 스승을 만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추사는 운이 좋은 예술가에 속한다. 자질을 갖춘 학생이 먼저였는지 위대한 스승이 먼저였는지 나로선 알 길이 없으나 추사가 유달리 스승복이 많았던 사실 만큼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그가 여섯 살 되던 무렵, 재상이었던 박제가가 길을 지나다 대문에 써서 붙인 추사의 ‘입춘대길’ 글씨를 보고 스승을 자처하게 된 일화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그대로다.
박제가는 추사에게 중국(당시 청나라)으로 건너가 꿈을 키울 수 있게 해 주는 등 추사로 하여금 예술가의 자질을 키울 수 있도록 문호를 열어주는 역할을 수행했다.
중국으로 건너간 그는 또 다시 대스승을 만나게 된다. 추사의 솜씨에 탄복한 청 학문의 태두로 당대의 대가였던 옹방강이 대번에 그를 자기 제자로 받아들인 것이다.
옹방강은 추사에게 고증학, 금석학, 경학 등을 섭렵시켰을 뿐 아니라 자신의 아들 옹수건과 형제의 의로 교류를 나누게 했다.
스승 옹방강의 배려로 추사는 조선인 신분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지식을 익힐 수 있는 특혜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또 다른 석학이었던 완원 역시 추사에게 엄청난 신간서적들을 소개하며 새롭게 솟아나는 신학문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했다.
지금 이순간 세계 최고의 진학률과 교육열을 자랑하고 있는 대한민국에 살고 있지만 시대에 맞는 진정한 스승 찾기가 가히 하늘의 별따기 수준이라는 푸념은 흔히 듣게 된다.
철학과 사상으로 사람들 마음을 위무하고 학문의 열정을 자극하는 위대한 사상가나 철학자 배출도 그만큼 어려워진 게 사실이다.
그런 만큼 그 시절 추사가 누린 호사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고 하겠다.
흔히 추사 예술의 진수라고 할 수 있는 추사체 완성시기를 그가 제주도 유배를 다녀온 전후로 잡는다. 추사 예술의 일등공신이 결국 고행의 시간들이라는 걸 인정하는 셈이다.
부마의 집안(영조의 사위가 추사의 조부)으로 왕궁 못지않은 환경을 갖춘 월성위궁 종손으로 부러울 것 없이 성장한 그에게 인생의 엄청난 시련이었을 유배의 시간들이 그의 예술과 학문을 심오한 경지로 이끌었다는 사실은 개인적으로도 오래 눈길이 머무는 대목이다.
시대적 불운 때문에 감내해야 했던 유배지의 오랜 고독과 고통을 뜨거운 예술혼으로 승화시킨 추사의 위대함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그로 인해 우리 삶의 비밀을 조금은 알게 된 것 같기도 하다.
문득 쉽게 얻어지는 것은 그만큼 가치가 떨어질 수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치니 내 앞에 가로놓인 고통의 무게가 덜어지는 느낌이다.
덕분에 삶의 고통이 자신의 역량을 승화시킬 수 있는 자원이 될 수도 있다고 새롭게 자신을 다 잡게 됐다.
어려움이 닥친다면 정면승부하고 그것을 통해 나 자신을 한 단계 높일 수 있는 역량을 키우겠다는 자신감이 마음 속에서 뭉게 뭉게 피어오른다.
희망의 소리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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