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주식보다 미술투자가 좋다>-성공투자는 발품과 가슴

박정수 (작가·미술칼럼니스트)

김유진

| 2010-05-02 11:09:37

(박정수-작가.미술칼럼니스트)

눈으로 보기 VS. 마음으로 보기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하지만 미술품을 볼 때는 ‘마음은 눈을 여는 창’이다. 중국 북송(北宋) 때 정치가이자 문학자인 소식은 “대나무를 그리려면 반드시 가슴속에다 대나무를 완전히 만들어 놓은 후 붓을 들고, 화면 안에 어떻게 그릴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그리고자 하는 바가 발견되었을 때에 급히 일어나 이를 쫓아 붓을 휘둘러 곧바로 이루어내야 하는데, 그 본 바를 추적하기를 마치 토끼가 튀는 순간 솔개가 덮치듯이 해야지 조금만 머뭇거려도 곧 사라지고 만다(故畵竹必先得成竹於胸中, 執筆熟視, 乃見其所欲畵者, 急起從之, 振筆直遂, 以追其所見, 如兎起?落, 少縱則逝矣)고 했다.

그림을 그릴 때 눈에 보이는 것을 먼저 그리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것을 마음이 다 이해했을 때 그림으로 옮기라는 것이다. 어떤 유형의 작품이든 그림을 그리는 작가는 눈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는 바를 그려내는 것이기 때문에 구매자의 눈에 든다고 해서 반드시 마음에 맞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Gilles Deleuze)는 “감각이란 빛과 색의 자유로운 혹은 대상을 떠난 유희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신체 속에 있다. 비록 그 신체가 사과의 신체라 할지라도 상관없다. 색이나 감각은 신체 속에 있다. 공중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려지는 것은 감각이다. 그림 속에서 그려지는 것은 신체이다. 그러나 신체는 대상으로 재현된 것이 아니라, 그러한 감각을 느끼는 자가 체험한 신체이다”고 하면서 정신이 깃들어 있는 신체가 눈으로 보고 표현하는 것은 모두 신체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는 것은 모두 신체를 그리는 것이라고 했다. 다시 말하면 눈으로 보는 것은 마음으로 보는 것과 달라서 미술품 자체를 이해하는 데 방해 요소로 작용한다는 의미이다.
미국의 철학자 넬슨 굿먼(Nelson Goodman)은 “만약 세상의 모든 것들이 예술 작품이라면, 길가의 돌들이나 집들, 세상의 모든 사건들이 예술 작품이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모든 것들이 예술 작품이 아니라고 한다면, 예술 작품과 예술 작품 아닌 것을 구분할 방법이 없다. 예술가가 예술품이라고 하면 예술 작품인가? 아니면 미술관이나 전시장에 전시가 되면 예술이 되는가? 확실한 답이 없다. 어떤 물건이 어떤 경우에는 예술 작품이기도 하지만, 보통의 경우에는 예술이 아닌 경우가 많다. 어떤 것을 예술품으로 봐야 하는가 하는 물음보다, 어떤 것이 예술 작품인가 하는 물음이 훨씬 쉽다.”고 했다.

소식이건 들뢰즈건 굿먼이건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이다. 아주 쉽게 말하자면 ‘마음의 눈으로 미술품이 보이기 전까지는 미술품을 안 사는 것이 이익이다’라는 결론이다.

굿먼이 말하는 “어떤 것을 예술품으로 봐야하는가?” 와 “어떤 것이 예술 작품인가?”의 문제는 좀 더 짚어볼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해 보자.


예술이란 무엇인가? 이 오래된 물음의 대답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심을’ 예(藝)의 원형은 ‘심는다’라는 뜻의 집( )이었다. 나중에 ‘풀’ 초(?)와 ‘김매다’는 뜻의 운(耘)의 생략형인 운(云)이 붙어서 현재의 예(藝)가 되었다. 따라서 예술(藝術)이란 ‘경작’의 의미보다 ‘심신을 닦는 정진의 길’이라는 뜻이 더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술(術)은 열매가 맺혀 있는 모양의 상형문자인 출(朮)에 ‘나아가다’의 뜻인 행(行)이 붙어 ‘반드시 가야 할 방도’라는 의미이다.

외국어로는 테크네(techn 그리스어), 아르스(ars 라틴어), 아트(art 영어), 쿤스트(Kunst 독일어), 아르(art 프) 등이 있는데 수공의 의미가 강한 숙련된 기술 활동이라는 의미들이다. 따라서 예술이라는 말이 담고 있는 이런 뜻을 종합해보면 어떤 것을 예술품으로 봐야 하는가 답이 나온다. 미술품의 이미지가 뜻하는 바가 있어야 하고, 뜻하는 바가 사회적 정신을 담고 있어야 한다.

우리말을 알기 위해서는 ㄱ,ㄴ,ㅏ,ㅑ 와 같은 자음모음을 배운 후 ‘영희야 놀자’ ‘바둑아 놀자’와 같은 가벼운 단어 조합을 배워야 한다. 그래야만 사회성이 담겨진 언어를 능숙하게 이해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미술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형 언어를 배워야 한다. 정당한 조형 언어를 습득하기 전까지는 눈으로 봐야 하는데, 초보의 눈을 믿어서는 안 된다. 어떤 미술품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개인적이기도 하면서 포괄적 보편성을 지니고 있는 개념이다. 세상에는 글로 해석하기 힘든 감성적 정신적 문제들이 많이 있다. 때문에 보고 느끼면서 다양한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방법이 가장 빠르다. 눈보다는 가슴이 필요하다. 눈의 경험이 축적되어야 가슴이 열린다. 많이 다녀야 한다. 많이 봐야 한다. 이것이 발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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