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산호의 서평칼럼] 나는 항상 패배자에게 끌린다-김경
박산호
| 2013-12-16 11:37:09
질문 하나 하겠다. 당신은 어떻게 책을 고르는가? 사실 이 문제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어제 읽은 타임지는 해리 포터 시리즈 작가 조앤 K 롤링이 로버트 갤브레이스라는 가명으로 쓴 소설 <쿠쿠스 콜링>이 그녀의 작품이라는 게 알려지기 전까지는 500부밖에 못 팔렸다가 극히 수상쩍은 방법으로 작가의 정체가 알려지면서 곧바로 베스트셀러로 입성한 현상을 다뤘다. 그 이유로 책 한 권 값은 영화나 음악 앨범보다 비싸기도 하고, 그 값을 치렀다고 해서 책의 내용을 다 파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다른 문화 상품과 비교해서 소비자가 훨씬 더 많은 노력을 투자해야 하기 때문에 작가의 이름에 판매고가 오락가락하는 경우가 많다고 주장하던데. 그 외에도 표지가 예술이라거나, 제목을 읽는 순간 큐피드의 화살처럼 심장에 박혔다거나, 생의 당면과제(이를테면 운전면허, 토익, 주식, 요리, 연애 같은)를 풀어줄 수 있어서 등등의 이유가 있겠다.
명색이 출판 번역가로서, 그리고 취미를 묻는 질문에 항상 독서(사실은 스키와 명화 수집이라고 폼 나게 대답하고 싶지만 나란 인간은 재미없이 솔직하기만 하니까)라고 대답하는 나마저도 책을 고를 땐 지극히 즉흥적으로 집어 든다. 그래서 이 책 <나는 항상 패배자에게 끌린다>를 고른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패배자’란 단어에서 어렸을 때 읽었던 박완서의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가 떠올라서. 지루한 일상에 환호를 갈망하던 작가가 우연히 마라톤이 열린 걸 알고 승자를 맞이하기 위해 허겁지겁 달려갔지만 막상 본 건 너무나도 정직하게 고독하고 고통스런 얼굴의 꼴찌였고. 그 얼굴에 감동해서 손바닥이 붉어지게 박수를 쳤다는 이야기에 순간 전율했다. 나이는 어렸지만 일찍부터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1등보다는 꼴찌에 가까울 거라는 걸 예감한 그런 서글픈 동질감에서였을까. 꼴찌까지 포용하던 시대에서 ‘루저’ 즉 패배자는 가차 없이 삭제되는 시대로 바뀌었지만 어쨌든 이 제목에서 묘한 향수를 느꼈다.
두 번째 이유는 저자 김경의 도발적이면서도 발랄 경쾌한 전작 <뷰티풀 몬스터>에 반해 그녀의 새 책이 궁금했다. 러브호텔을 순례한 경험을 토로하고, 명품 백보다 저렴한 그림을 구매하라고 부추기고, 얄팍한 동정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빈국의 아이들에게 후원금을 보내는 건 어떠냐고 묻고, 내 취향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기이한 퍼포먼스를 벌이는 낸시 랭의 애교에 대해 쓴 글은 충분히 매력적이었고 한편으로 끝까지 다 까발리는 솔직함이 부럽기도 했다. 그래서 패배자란 제목을 달고 온 그녀의 이야기를 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듯 즉흥적인 내 선택은 별로 만족스럽지 못했다. ‘패배자’란 단어는 책을 펼치고 보니 낚시성 멘트에 가까웠고, 기실은 패배자(읽어보니 패배자도 아니더만!)들에게 끌리는 그녀의 취향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런 젠장! 난 호사스런 취향이 아니라 뭔가 전투적인 이야기를 읽고 싶었다고. 그러나 까르보나라 스파게티 한 접시 또는 백화점 매대에 누워 있는 머플러 한 장이나, 카페모카(사실 살인적인 칼로리에 입도 안 대지만)두 잔을 마실 수 있는 돈을 지불했으니 일단 읽어보자고 다짐했다. 그렇게 책장을 넘기면서 킥킥거리며, 가끔은 밑줄을 그어가며, 또 가끔은 그녀의 화려한 말발에 감탄도 해가며 읽었다.
결혼해도 괜찮아, 라는 소제목으로 시작한 이 책은 작가의 지극히 사적인 취향(그러니까 결혼, 사랑, 섹스)에 대한 이야기에서 패션지 기자로 살아온 세월을 입증하듯 패션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간다. 로고를 추종하다 못해 숭배하고, 간지에 살고 간지에 죽는 패션에 열광하며, 프라다 백이라면 12개월 할부로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기세인 작금의 세태에 대해 논한다. 매끄럽고 재미있긴 하지만 문제는 이걸 누가 모르냐는 거지. 그렇게 투덜투덜 책장을 넘기다 작가가 예찬하는 대상들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갔는데 다행히 그 부분은 즐거웠다.
록의 제왕 주다스 프리스트(나는 모르는 제왕)내한 공연을 본 감상, 안무의 혁명가 피나 바우쉬, 스타일과 지성의 여왕 수전 손택, 김기덕과 싸이, 주성치와 유세윤, 자코메티, 마우리치오 카텔란과 같이 한 시대의 획을 그었거나, 한 시대를 삐딱하면서 재미있게 살아가는 예술가들의 이야기가 나왔는데. 솔직히 절반은 알고 절반은 그 존재조차 몰랐던 사람들이지만(여러분은 과연 몇 명이나 아십니까?)지극히 평범한 인간으로서 지독한 천재나 꼴통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삶을 읽는 건 언제고 흥미롭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멘토와 스피드와 스타일과 가난과 애티튜드 같은 키워드를 통해 지금의 한국 사회를 묘사하는 글이 나왔다. 역시 무난하게 읽히지만 이제는 단기기억상실이 맹위를 떨치는 나이인지라 책장을 넘기자마자 곧바로 잊어버리는 부작용이 속출했다. 아무튼 한 개인의 취향을 다룬 책을 읽으며 대하드라마의 감동이나 꼭꼭 씹어 삼키고픈 정보를 기대한 내가 바보였다. 한 개인의 취향이란 말 그대로 그 사람이 누구인지 말해주는 성명서와 같다. 그건 타인이 찬성하거나 반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넘어가야 하는 것. 다만, 김경의 글을 사랑했던 독자로서 그녀의 말랑말랑하면서 나른한 취향보다는 일말의 독기가 번뜩이는 날카롭고 지적인 글을 읽고 싶다는 미련은 한 가닥 남았다. 그리고 덤으로 과연 나의 취향은 뭐지?란 물음표 백 개의 질문이 남았다.
*이글의 원문은 네이버 카페 '더라인 통번역 오픈케어'의 [박산호의 책과의 연애](http://cafe.naver.com/thelineopencare/4145)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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