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에 안중근의사의 유언을 되새기다
김대곤 오방CSO리더십연구원장
김대곤
| 2014-03-12 16:24:38
1910년 3월10일 안중근의사는 중국 여순 감옥에서 동생 정근과 공근 그리고 홍신부를 만나 이상과 같은 '최후의 유언'을 하셨다.
안 의사는 동양평화의 파괴범이며 한민족을 고통속으로 몰아넣은 이또 히로부미를 사살함으로써 일본의 한국침략을 묵인하려든 국제사회에 대한독립의 정당성을 인정하게 만들었고 마침내 우리는 자주독립국가가 되었다.
안 의사가 순국하신 지 100년, 국권을 되찾은 지 벌써 70년이 다 돼가지만 우리는 안중근 의사의 시신을 조국으로 모시기는커녕 아직 시신이 묻힌 장소조차 모르고 있는 실정이다.
안타까운 심정에 김구선생은 문효세자가 묻혔던 자리(지금의 효창공원)에 윤봉길, 백정기, 이봉창의사의 유해를 모시면서 안중근 의사의 허묘를 만들어 두었다.
안 의사가 사형된 후 여순감옥 근처 공동묘지에 묻혔을 것이란 주장이 있지만 확실치 않다. 일설에 의하면 일본은 안중근묘가 성지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위생선을 통해 안 의사의 시신을 일본으로 가져가 비밀리에 처리했을 것이라는데 이 말이 맞을 것 같다.
일본이 정말로 과거사를 반성한다면 지금이라도 안중근 의사의 시신보관처를 밝혀야 하고 우리 정부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하루 빨리 조국에 모셔야 한다.
한편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일부이긴 하지만 한국사람조차 안중근 의사의 이또 히로부미 처단에 대해 과소 평가하거나 청년의 객기어린 애국행위로 치부하면서 일본 근대화를 이끈 이또를 살해한 것은 지나쳤다는 반응도 있다.
한심한 일이다. 이래서 역사를 배워야 한다. 우리가 과거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또다시 일본의 속국으로 전락할 수가 있다. 최근의 국제정세는 과거 안중근 의사 당시의 시대상황과 흡사하다. 일본의 아베총리는 초대 총리 이또처럼 군국주의의 부활을 꿈꾸며 자위대를 강화시키기 있고 위안부 문제나 아시아인 학살 등의 반인륜적 행위를 은폐시키고 있다.
1909년 10월26일 아침 9시, 하얼빈역에 당도한 이또를 저격한 이유에 대해 안중근 의사는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안중근 의사는 단순히 일본을 미워한 사람이 아니었다. 당시 제국주의적 서양열국들이 아시아지역을 식민지화하는 것에 맞서 한국, 중국, 일본이 합쳐 동양의 평화를 이뤄보자며 '동양평화론'을 제창하신 분이다.
주장의 요체는 다음과 같다. 일본이 중국으로부터 빼앗은 대련과 여순을 돌려주고, 여순에 한ㆍ중ㆍ일 3국이 공동 관리하는 군항과 동양평화회의 및 은행을 조직하고, 3국 통용의 공동 화폐를 발행하자고 제안했다.
요즘 유럽공동체(EU)와 같은 발상으로 당시 생각조차 하기 힘든 획기적인 동양평화구상이었다. 필자는 일본인이라면 무조건 미워할 것이 아니라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국적에 상관없이 서로 존중하며 힘을 합하는 것이 안중근 의사의 유언을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핵심은 위선과 거짓, 군림과 지배를 일삼으며 생명을 소홀히 여기고 평화를 파괴하는 자는 국적을 불문하고 이토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안중근 의사는 3월10일 '최후의 유언'과 함께 다음과 같이 동포에게 고하였다.
“내가 한국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삼년 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도달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2000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자 유감이 없겠노라.”
그로부터 보름 후인 3월26일 오전 10시 안 의사는 어머니가 보내준 한복을 갈아입고 “나는 대한독립을 위해 죽고 동양평화를 위해 죽는 것이니 죽어 유감이 없다”고 담담히 마지막 발언을 하시고 32살의 젊은 나이로 장렬히 순국하셨다.
3월이 가기 전에 안 의사의 유언을 따르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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