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까지 2시간20분-벌교 KTX

남영진 한국감사협회 고문

남영진

| 2015-04-23 16:54:27

곡우(4월20일)를 즈음해 녹차땅인 남도 보성 강진 해남 등 땅끝을 다녀왔다. 봄꽃이 절정인 시기는 지났으나 늦은 겹벚꽃과 모란이 아직 남았고 길가엔 김치 담는 갓꽃이 점점이 노랗게 피어 봄임을 실감했다. 갓꽃은 그냥 보기는 제주도 봄의 전령인 유채꽃처럼 보이지만 군락이 아닌 점점이 피어 있어 자세히 잎을 보면 여수 돌산도 갓김치잎 그것처럼 널찍하다.

순천서 순천만생태정원을 보고 유일하게 보존되어있는 조선시대 낙안읍성을 보고 계곡을 따라 내려오니 조정래 ‘태백산맥’의 주무대인 벌교읍이었다. 소설하나로 우리나라 ‘빨갱이 콤플렉스’를 어느 정도 해소한 태백산맥 문학관은 월요일이라 휴관이어서 대신 현부자집과 무당 소화의 집을 휘휘 돌고 못내 아쉬워 소설속 염상구 염상진 등이 주름잡고 다녔던 역전삼거리로 나갔다. 1922년 광주의 송정리에서부터 순천까지 철로를 만들 때부터 있었던 우리에게 친숙한 조그만 옛역사 처마엔 빗속에 젓은 플래카드가 붙어있었다.

“호남 KTX개통-서울까지 2시간20분”

으익! 이렇게 빠른가? 지금은 완행은 거의 손님이 적고 광주나 서울직행의 KTX가 돋보였다. 서울에서 제일 멀다는 땅끝마을이 바로 밑의 강진. 해남인데 서울서 KTX타고 이곳 보성이나 벌교쯤서 내려 차로 해남 토말까지 간다해도 40분이면 될 거고 그러면 섬을 빼고는 3시간이면 서울서 전국의 어느 오지라도 갈수 있는게 아닌가? 몇 년전만해도 ‘전국이 일일생활권’이라 했는데 이제는 ‘한나절 생활권’이 됐다.

서울서 지방 지사나 거래처에 출장간다 해도 며칠 걸리던 것이 이제는 당일출장이 많아져 젊은 사원들이 지방 출장때 한잔씩 대접받던 풍습이 없어질 정도라나. 하기야 화상회의니 전자결재니 카톡대화니 해서 대면보고나 상담할 필요가 없어 지방출장도 많이 줄었지만 아침 출근길에 갔다가 점심때 사람만나고 저녁에 서울에 도착할 수 있으니 1박2일 출장은 의미가 없어졌다.

이는 물론 통신은 물론 전국에 교통수단이 많이 확보돼 있기 때문에 가능. 항공망은 물론 철도와 고속도로가 잘 깔려 서울에서 지방까지 남북만 아니라 이제는 동서간에도 영동 88 남해고속도로는 물론 음성-평택, 청주-상주, 당진-대전,완주-순천, 목포-여수등 잘 연결되어있다.

일제는 1883년 제물포 부산 원산을 시발로 목포 군산 마산 남포 신의주 함흥 등 항구를 열고 도구로 한반도에 제일먼저 철도로 수탈의 길을 놓았다. 1899년 제물포서 노량진까지 첫 철도를 개통하고 이때 경부선 건설을 시작하면서 다음해 한강철교를 넘어 서울역에 입성했다.

이어 1905년 러일전쟁에 이겨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뺏고 경부선 580KM구간(현재는 직선화로 450KM가 못된다)을 개통해 바로 부산에서 시모노세키까지 현해탄을 넘는 부관(釜)연락선까지 띄운다. 1906년에는 신의주까지 경의선을 놓아 1908년에는 부산에서 서울을 거쳐 신의주까지 가는 특급인 융희호(고종황제의 연호)를 출범했다. 이로써 1910년 합방전까지 한반도 남북의 동선인 부산-서울-평양-의주를 연결했고 합방직후인 1911년 압록강건너 안동을 거쳐 봉천으로 가는 만주진출의 포석을 깔기 시작했다.

일제가 제일 원하던 것은 쌀이었다. 조정래의 '아리랑‘에 나오는 ’징게밍갱‘(김제만경)들판에서 생산되는 양질의 쌀을 일본으로 실어 나르기 위해선 금강을 타고 올라온 강경포구로는 너무 작았다. 아예 고군산열도로 트인 금강하구에 ’쬐보선창‘을 만들고 큰 부두를 신설했다. 마찬가지로 나주 호남평야의 쌀을 실어가기위해 영산강의 포구인 나주 영산포를 버리고 서해바다로 나가는 목포 유달산밑에 큰 항구를 만들었다.

이를 위해 일제는 경부선개통 바로뒤인 1914년 서울-대전-익산(이리)-김제-송정-나주-목포의 ’비내리는 호남선‘을 개통하고 이리와 군산, 이리와 전주까지 잇는 지선을 놓는다. 호남의 중심인 광주를 통과해 순천, 여수로 가는 전라선은 불요불급해 일제의 만주침략이 본격화되는 30년대초에 개통했고 수탈항구인 군산, 목포로 통하는 호남선과 지선은 20년이나 앞선 1910년대에 놓았다.

일제는 호남의 곡창인 나주평야의 쌀을 목포에서 실어 남해를 한창 돌아서 시모노세키나 큐슈로 가야했기에 남해안쪽의 항구가 필요했다. 여기에 착안한 것이 벌교포구다. 꼬막채취만 하던 갯벌에 간척을 하고 부두를 만들었다. 1922년 광주에서부터 나주 영암 해남 강진 보성등지의 농수산물들을 순천까지 철로를 깔고 벌교역에서 내려 일본으로 날랐다. 전주에서 남원을 거쳐 광주 순천 여수로 이어지는 전라선은 1937년에야 개통됐다. 당시 서울에서 벌교까지는 돌아가야 하루24시간이상 걸려야 갈수 있을까 말까했던 것이 이제는 2시간20분이라니 정말 빨라졌다. 빠른 것이 좋은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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