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농사직설'
남영진
| 2015-07-06 17:20:23
글자 그대로 전국의 현자()들을 모은(集) 집(殿)이란 뜻이다. 세종이 나이든 재상과 젊은 학자들을 함께 모은 것은 그들의 연구와 토론을 통해 백성들에게 먹고 병을 고치고 말과 글을 제대로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자 한 것이다. 집현전 10년만인 1429년에 나온 첫 책이 ‘농사직설’이다. 이의 책임자로 문신 정초와 변효문을 임명해 전국에서 올라온 여러 비법을 문류하고 짜집기해 이를 집성했다.
정초는 이 책의 서문에서 “풍토가 같지 않으면 농사짓는 방법이 같을 수 없어서 세종임금이 각도의 감사에게 명하여 주 현의 노농(老農)들에게 지역에 따랄 경험한 바를 자세히 듣고 수집하도록 해서 본서를 편찬하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우리나라 풍토가 중국과 다른데도 농서도 대부분 중국 것을 그대로 쓰기 때문에 잘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14년후인 1443년에 임금이 직접 반포한 훈민정음의 서문에 “나랏말씀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로 서로 사맛디 아니할세..”의 원형이 이미 나타난 것이다.
농사직설은 간단한 책이다. 당장 급한 벼 보리 밀 콩팥 녹두 참깨 조 수수 기장 메밀 피 등 10가지 주요곡식의 생산방법을 전국에서 들어서 편집한 것이다. 후대에 관에서 듣고 연구해 계속 보완했고 사림학자들이 산림경제나 임원경제지등의 책을 더 내놓았다. 재미있는 것은 그때까지만 해도 논에서 벼의 생산이 쉽지 않아 토질이 좋지못한 곳에서는 피를 재배했다는 것이다. 쌀은 인도의 다우지역인 아샘지방서 시작돼 캄보디아 베트남의 메콩강유역을 거쳐 중국의 양자강 이남을 통해 한반도에 전해졌을 거라는 추측인데 그전에는 피를 벼대신 재배했다는 것이다.
몇십년 전만해도 논에 벼를 심고 어느 정도 크면 피가 벼보다 쑥 올라와 이 피뽑기와 잡초제거가 논농사의 어려운 일이었는데 조선조 초기만 해도 피를 주요 곡식으로 보고 있다. 서울 북촌의 사직단(社稷壇)이나 왕조를 뜻하는 종묘사직(宗廟社稷)의 사직은 토신(社)과 곡신(稷)을 함께 섬기는 곳이다. 이 곡식을 대표하는 직(稷)이 피다. 옛날에는 물을 대야하는 어려운 벼보다 가뭄에도 강한 피를 더 많이 심었다고 한다. 서울에서 천안 못미친 곳에 직산면이 있는데 이 직산이 피 직을 쓴다. 일부 고대사가들은 이 직산이 삼한시대 마한의 수도였을 것으로 주장한다. 종묘사직을 고려한 추론인 것 같다.
세종은 이렇듯 책을 만들고 과학기구들을 개량하고 영토를 넓히는데 신분의 귀천, 나이의 많고 적음을 따지지 않고 등용했다. 집현전 학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동래부의 관노였던 장영실을 등용해 중국에서 들여온 지구본을 개량해 1433년에 혼천의를 그리고 1441년에 측우기, 해시계들을 만들었다. 이 기구들로 하늘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홍수와 가뭄에 대비한 정책을 수립했던 것이다.
이 사이에 중국의 한약서를 우리나라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약초와 산물을 농사직설때처럼 지방의 노인들과 한약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어 ‘향약집성방’이란 의서를 만들어 빈포했다. 향약(鄕藥0이란 중국과 다른 우리나라 약이란 말이다. 이후 선조때 허준이 쓴 ‘동의보감’의 원형이 이미 세종때 밑그림이 그려진 것이다.
세종은 여진족이 발호하는 압록상 상류지역과 두만강 중류지역을 경략해 지금의 우리나라 영토를 확정했다. 우선 최윤덕으로 하여금 압록강 중상류지역인 여진족(만주족)들을 쫒아내고 무창군 자성군등 4군을 설치했으며 김종서장군을 보내 백두산에서 흘러내린 두만강이 동해로 꼬부라지는 지역의 여진족들을 정벌해 경원 경성, 온성 종성등 6진을 설치했다. 이 지역은 계속 분쟁이 일어나 성종때 신숙주가 마지막 정벌해 국경으로 확정했다.이로써 함흥과 길주를 엮어 만든 함길도가 경원 경성까지 확대돼 함경도가 되어 전국 8도의 이름이 확정된 것이다. 세종은 이 곳에는 현지의 민심을 감안해 중앙에서 관리를 내보내지 않고 현지민을 관리로 쓰는 토관(土官)제도를 도입했다.
한글창제때도 승려의 도움을 받고 만주지방의 말까지 연구해 음운을 정리했다. 우리역사 5천년의 최대업적인 것이다. 문자를 만들어 쓴 것은 세계유일하다. 알파벳이나 한자는 다 자연발생적이다. 세종이 훌륭한 것은 인재를 등용하고 그들을 잘 활용했다. 훈민정음에 반대해 훈구재상인 최만리가 “한자가 아닌 새 문자를 만드는 것은 오랑캐짓”이라고 대들었지만이를 포용하고 딱 하룻밤 옥에 가두고 아침에 풀어주는 것으로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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