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을 생각한다
공희준 정치컨설턴트
공희준
| 2016-10-29 15:37:45
박근혜 대통령이 최순실이라는 정체불명의 특정한 일개인에게 가깝게는 지난 3년 8개월간 우리나라의 국가권력을, 길게는 40년 동안 박 대통령 자신의 삶을 통째로 봉헌해왔다는 충격적이고 엽기적인 뉴스를 접하자마자 내 머릿속에 단박에 떠오른 속담 아닌 속담이다.
1917년 2월, 러시아 제국의 수도였던 페트로그라드(현재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혁명이 발발했다는 급보를 전해들은 블라디미르 레닌 역시 필자가 느끼는 감정과 똑같은 생각을 품었으리라. 당시 스위스에서 희망 없는 망명생활을 오랫동안 이어오던 그는 즉시 하던 일을 모두 중간에 작파하고서 사실상 독일 군부가 제공해준 밀봉열차를 타고 2천 킬로미터 가까운 거리를 밤낮 없이 달린 끝에 수도에 도착했다. 레닌은 열차에서 내리기 무섭게 저 유명한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테제를 사자후로 토해냈다.
아버지 최태민씨의 대를 이어 박근혜 대통령의 몸과 마음을 지배했다는 최순실씨는 러시아 궁정을 들었다놨다한 요승 라스푸틴에 비유되곤 한다. 라스푸틴에게 홀려 전쟁도, 민생도 모두 말아먹었던 차르 니콜라이 2세와 그의 부인인 알렉산드라 황후를 반반씩 합쳐놓은 인물이 박근혜라는 지적이다.
문제는 우리에게는 니콜라이 2세도, 알렉산드라 황후도, 라스푸틴도 두루 갖춰져 있지만 민중의 분노를 정치를 바꾸고, 나라를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동력으로 활용할 수 있는 레닌 같은 과감하고 명민한 지도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이 한 자릿수로 추락했다는 여론조사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 한 자릿수 지지율이 박근혜 정권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참여정부도 집권 말기 한 자릿수 지지도를 기록한 바가 있다. 그러나 참여정부의 한 자릿수 지지율은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실망감과 배신감의 표현이었을 뿐이지, 정권의 정통성과 정당성 자체를 부정하는 증거로까지 해석되지는 않았다.
레닌처럼 무장봉기를 일으켜 일거에 체제를 전복하자는 주장을 펴려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필자는 대한민국을 전화기와 자동차나 팔아댈 궁리에만 열중하는 그저 그런 중진국이 아니라,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강대국으로 우뚝하게 세우고 싶은 꿈을 지닌 지독한 보수우파적인 세계관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박근혜 정권은 위정자들이 절대로 잃어서는 안 될 대단히 중요하면서도 필수불가결한 자산을 치명적으로 상실했다. 바로 국민의 신뢰다. 무신불립(無信不立)이라고 했다. 의역하자면 백성의 믿음이 사라지면 더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뜻이다. 국민의 신뢰를 완전히 잃어버린 박근혜 정권은 경제 살리기와 일자리 만들기도, 4차 산업혁명 준비와 미래먹거리 창출도, 북핵문제 해결과 한반도의 평화 실현도 전혀 해낼 수가 없다. 박근혜는 이제 숨 쉬는 일을 빼놓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상 초유의 살아있는 미라 대통령이 되었다.
허나 국민들은 시선을 청와대에서 야당들로 돌리면 오히려 화가 더 치밀고 욕부터 나오고 만다. 차기 대선 지지율 1위라는 문재인 전 대표는 기존 정치구도가 유지되기를 바라면서 복지부동 모드에 들어갔다. 제1야당이자 원내 1당이라는 민주당은 탄핵을 추진했다가 혹여 역풍이라도 맞을까봐 철저히 몸을 사리는 중이다.
국민의당의 모습을 보면 더욱 한심하고 추레하다. 현직 대통령이 하야하면 60일 이내에 다음번 대통령을 선출하는 보궐선거를 치러야 하고, 그러면 문재인에게 어부지리를 안겨줄 수 있다고 전전긍긍하며 당 전체가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다. 이 엄중하고 급박한 시국에 예정대로 영호남 민생탐방에 나선 안철수 의원의 행태는 물이 들어오자 노를 젓기는커녕 엉뚱하게 등산복 챙겨 입고 산으로 올라간 형국이다. 눈치가 없어도 저렇게 없을 수가 없고, 저토록 무딘 감각이면 적장의 목을 베기는 고사하고 도마 위에 얌전히 놓인 무도 못 썰 지경이다.
2016년 가을은 단군 이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맞이할 선거혁명의 기회다. 이 천재일우의 호기를 문재인은 자칫하다가는 게임체인지가 이뤄져 1등의 지위를 놓칠 수도 있다는 불안감 탓에, 안철수는 문재인에게 어부지리를 줘서는 안 된다는 소심한 때문에 헛되이 흘려보낼 분위기이다.
청와대가 무당과 미라의 놀이터가 되고, 국가가 선장도 없이 표류하는 대한민국에서 정치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핵심적 자질은 대담한 정치적 상상력이다. 박근혜가 지금 당장 퇴진해 60일 이내에 대선이 치러져야 한다고 가정해보자. 새누리당은 멘붕에 빠져 후보를 내지 못한다. 따라서 반기문이든 유승민이든 대권경쟁 대열에서 자동 탈락이다. 이제 무대 위에 남는 선수는 민주당과 국민의당, 문재인과 안철수뿐이다.
그럼 어떤 사태가 벌어질까? 민주당은 대선후보 경선 실시 여부를 두고 친문세력과 반문진영으로 갈라져 심각한 자중지란에 빠질 가능성이 크고, 소위 단일화 프레임을 훌훌 털어낸 안철수는 집권 가도에 날개를 달게 될 것이 분명하다.
현실은 이렇게 모든 국민들이 박근혜를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민주당과 국민의당만이, 문재인과 안철수만이 박근혜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꼴이다. 그들에게는 새누리당이 없는 대선정국을 기획하고 만들어나갈 대담한 정치적 상상력이 결여된 이유에서다. 물은 당신들을 영원히 기다려주지 않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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