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대하소설 황제의 싸움터

    칼럼 / 시민일보 / 2003-08-05 19:0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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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보는 제주 4.3 民亂
    (4) ‘낮에 뜬 별’들의 행진

    “서 중위님은 하늘아래 둘도 없는 나의 은인이십니다. 생명의 은인…. 그 때 서 중위님이 도와주시지 않았더라면 저는 꼼짝없이 죽었겠지요. 조선사람 한 둘쯤 죽이는거야 파리목숨 빼앗는 것과 다르지 않았을테니까요”

    이만성은 침통한 목소리로 잠꼬대하듯 뇌까렸다.

    “이제 다 끝난일 아닙니까? 이형앞에서 처음으로 털어놓는 얘깁니다만, 나는 앞으로 제주인이 될지도 모릅니다. 이미 마음을 굳혔어요. 제주도는 참 좋은 고장이라고 생각하고 있지요. 성지(聖地)중의 성지라고 해야 하나요? 난생처음으로 그 같은 신비스런 장면을 보았대서가 아니라…”

    서 중위는 더없이 진지하고 엄숙한 얼굴로, 한창 잘나가다 결정적인 고비에 가서 복선을 깔며 말끝을 흐려버렸다.

    “네? 신비스런 장면이라뇨? 그게 뭔데요? 어서 속시원히 그 대목을 얘기해 주시지요. 사생활에 관한 극비사항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에또, 그에 앞서 서중위님의 신상에 관한 대목도 좀 말씀을 해 주시면 좋겠구요. 저부터 자기소개를 할까요. 저는 경성에서 왕족(王族) 한 분이 세운 사립 S전문학교(고등공업학과)에 3학년 재학중입니다. 적성에 맞춰서 문과계통을 선택하려고 했었지만, 학병(그 당시 전문학교이상 재학생은 이공계를 제외하고, 학병으로 끌려갔음)을 피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강력한 지시에 따라 본의 아니게, 공과계통으로 진로를 잡게 된 셈이었지요. 전쟁이 끝난 다음엔 적성을 찾을 생각입니다.”

    이만성은 아버지를 원망하며 신세 타령하는 목소리로,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아, 그랬었군요, S전문학교에 대해서는 나도 잘 알고 있어요, 중등학교과정도 벼얼이 되어있고, 대부분 귀족에 속하는 가문의 자제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학교 아닙니까? 밑바닥엔 항일투쟁 정신이 짙게 깔려 있어서, 친일파들에겐 눈엣가시였지요, 아마…? 나는 일본의 사립K대 경제학부에 적을 두었던게 화근이 되어서, 학병으로 끌려온 셈이지요. 고향은 경기도 개성이구요”

    학병으로 끌려나온 사실이 못 마땅하고 부끄러운 듯, 서 중위는 어깨를 움츠리며 기어드는 목소리로 어설프게 자기소개를 했다.

    “아, 그래요? 일본의 유명한 K대학이었군요. 나의 선배 한 분도 K대학에 적을 두었다가 학병으로 끌려나갔는데…”

    “조선인학생도 적지 않아요. 제주도 출신이라면 혹시 고정관? 웅변으로 명성을 떨친…”

    “맞아요, 나의 ‘영재의숙’ 3년 선배인데, 그 분을 서 중위님도 잘 알고 계시는군요”

    “고정관 그 사람이 이 형의 3년 선배라니, 사람의 인연이란 참 알다가도 모르는 일인가봐요. 사실 고정관은 웅변으로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케 한 자랑스런 조선청년이지요. 금세기 모든 청년들의 우상이 떠받들어지고 있는 행운아라구요”

    “역시 그렇군요. 바로 우리 한남마을 출신입니다. 서 중위님과는 동문사이라니 더욱 반갑습니다. 그럼 아까 말씀하시려다 잠깐 보류한 대목을, 자상하게 말씀해 주시렵니까?”

    “그렇잖아도 말씀 드리려던 참이었어요. 제주땅이 거룩한 ‘성지’라고 느끼게 된 데엔 그럴만한 사연이 있기 때문이지요. 나는 지금 한라산 중턱에 본부를 두고 있는 OO사단 본부 군수계통에 복무하고 있어요. 가끔 도선마을 냇가에 주둔하고 있는 대대본부에 다녀가곤 하는데, 그날도 잠깐 출장나왔다가 우연히 이형과 맞닥뜨렸었구요”

    서 중위는 흥분된 얼굴로 침방울을 튀기면서 신나게 호두를 꺼냈다. 이만성은 군침을 꿀꺽 삼켜가며 두 귀를 빳빳이 곤두세웠다. 더없이 심각하고 전례없이 엄숙한 얼굴이었다.

    “근래에 있었던 일입니다만, 아주 충격적인 사건이었다고 할까요? 일행은 세사람이었는데, 일본인 소위 하나가 끼였었어요. 우리 세 사람은 대대본부에 들렀다가 사단사령부로 돌아가는 길이었지요. 한라산 중턱에 이르기 직전 잡초가 우거진 널따란 벌판을 걷고 있었는데…아니, 저게뭐야? 하고, 세 사람은 엉겁결에 발걸음을 멈추고, 넋을 잃은 채 떨게 되었지 뭐예요”

    서 중위는 그 때의 위급한 상황을 떠올린 듯 얼굴이 굳어졌고 목소리는 떨려 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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