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대하소설 황제의 싸움터

    문화 / 시민일보 / 2003-10-15 18: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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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보는 제주 4.3 民亂
    (13) 큰나무, 설땅이 없다
    한남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이만성은 저녁때 ‘영재의숙’에서 만나기로 하고 고정관-조용석 등과 헤어졌다.

    그는 곧장 두 모녀만이 살고 있는 김대호 선생댁으로 달려갔다. 7년 전에 하룻밤 신세진 바 있었던 감회 깊은 집이었다. 인기척소리를 듣고 허겁지겁 밖으로 뛰쳐나온 감영선- 얼굴을 곱게 치장하고 말쑥한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막 집을 나서려는 참이었던지 몹시 들뜬 분위기에 휩싸인 그녀였다.

    “아이구, 웬일이세요 오빠가...? 그렇잖아도 제가 오빠를 찾아가려고 바삐 서둘렀었는데, 한발 늦어버렸네요. 오빠는 어떻게 족집게 점쟁이처럼 제 마음을 꿰뚫어보고 선수를 치셨나요? 누추한 방이지만 어서 들어오세요!”

    김영선은 꽃을 본 나비처럼, 아니 나비를 만난 꽃처럼 너무너무 기분이 좋은 나머지 깡충깡충 뛰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얼굴이 끌밋하고 몸매는 날씬한데다 아랫도리가 펑퍼짐해서 시 들어가는 노처녀를 떠올리기 쉽지만, 아직은 이팔청춘 꿈에 부푼 17세 소녀다. 되바라짐을 모르는 천진난만한 몸짓과 말솜씨가 스스로의 깜찍한 됨됨이를 잘 말해주고 있었다.

    “그동안 집안에 별일 없었어? 한번 다녀간 다고 벼르면서도 좀 체로 짬이 나지를 않아서...어머님은 지금 안 계신 모양인가?” 이만성은 느긋한 모습으로 자연스럽게 대해야겠다고 도슬렀지만, 목소리엔 눈물기가 하염없이 묻어 나와서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저렇게 좋아하는 영선에게 청천벽력 같은 슬픈 소식을 안겨준다는 것은 가슴에 못을 박는 잔인한 짓이 되겠지?’ 싶어서였다.
    “왜, 죄지은 사람처럼 망설이고 계세요? 얼른 들어오시지 않구...”

    그녀는 갑자기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말고 두꺼비 파리 잡아먹듯 이만성의 손목을 낚아채기 바쁘게 난특하니 확 끌어당겼다.

    “너, 혼자 있었어? 어머님은 어디가시고...?”, “엄마는 물질을...저녁 늦게 돌아오실 거예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어머님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리기로 할까?” 이만성은 망설이다가 강제로 끌려가다시피 못 이긴 체 하고, 그녀의 방안으로 들어섰다. 영선은 날렵한 동작으로 부엌문과 방문을 닫고 안으로 잠가버렸다. 마치 도망갈지도 모르는 애완동물을 ‘우리’안에 가두는 치밀한 주인의 행동을 떠올리게 했다.

    어색하고 쑥스럽게 느껴진 이만성은 굳어진 얼굴로 뿌리박힌 말뚝처럼, 방 한 가운데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나 영선은 앉으라는 말 한마디 없이, 몸에 걸친 외출복을 훌훌 벗어 젖히고 있지 않은가? 벗었던 옷이라도 챙겨 입어야 할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입은 옷을 벗어 젖히다니 이만성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짓거리 였다. 벗으라고 강요해도 거절해야 그게 정상일터인데...? 이럴 줄 알았더라면 방안으로 끌려들어오지 않았을 것을,

    엎질러진 물 도로 주워담을 수도 없는 일이고... 난감하기 이를 데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그렇다 해서 영선의 기분을 잡치게 할 수도 없고,

    ‘우리’안에 갇힌 애완동물 신세이고 보니, 인내력을 갖고 기다려보는 수밖에 묘안은 떠오르지를 않는다. 그런데, 다음 순간 외출복을 홀랑 벗어버린 영선은 비호같이 달려들어 이만성의 어깻죽지에 두 팔을 얹고, 목덜미를 휘감아 쥐어짜기 작전으로 들어갔다. 기습적으로 무차별 선제(先制)공격을 받은 이만성은 망연자실, 꿈인지 생시인지도 분간하지 못한 채,

    오로지 얼떨떨할 뿐이었다. 위기상황에 몰린 그는 중심을 잃으면 끝장이라는 비통한 생각 탓으로, 아랫도리에 온힘 버티기 작전으로 나가는 것만이 살길임을 깨닫고 있었다. 영선은 굶주린 맹수였고, 이만성은 급소를 공격당하고 질식상태에 빠져버린 노루나 토끼 같은 신세였다. 반항이나 역습이란 꿈도 꿀 수 없는 최악의 상태에 이만성은 몰려있었다.

    그녀는 발꿈치를 치켜들고 거세게 몸부림치면서, 활활 타오르는 입술을 빗발치듯이 휘둘러 이만성의 입술을 눈물겹도록 처절하게 깔아뭉개고 있었다. 무서운 재난이라는 불길함만이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을 뿐이었다.

    “누군가 들이닥치면 어쩌려구? 내가 그렇게 미운가?” 이만성이 슬그머니 한마디 던져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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