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대하소설 황제의 싸움터

    문화 / 시민일보 / 2003-12-09 17:3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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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보는 제주 4.3 民亂
    (6) 군중소리 발포소리
    “조국광복을 본 오늘날, 우리 후손들은 고개 들고 하늘을 우러러 볼 낯이 없습니다. 조상들이 악독한 일본제국주의를 몰아내기 위해 고귀한 피를 아낌없이 흘렸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후손들은 그런 사실조차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니, 이게 말이나 됩니까? 참으로 분통이 터질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조상들은 자랑스런 일을 목숨을 내걸고 과감하게 해냈던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손들에게 미칠 화근 두려워서 ‘법정사 항일투쟁’을 감춰온 게 사실이었습니다. 왜놈들의 잔악함이 얼마나 두렵고 가증스러웠으면 그랬을까요? ‘법정사 항일투쟁’은 지역별로 볼 때 3·1운동보다도 규모가 컸었기에 60명이 구속되었고, 전기고문·물고문·몽둥이고문 등 가혹한 고문으로 5명의 희생자가 나왔었다지 뭡니까. 뒤늦게나마 삼가 애도의 뜻을 표하고자 합니다. 그럼 저는 여기까지 말씀드리고, 오늘의 초청연사이신 서원형선생을 단상으로 모시겠습니다. 엄숙한 자세로 조용히 경청해 주시고, 끝난 다음엔 궁금한 대목에 대해 질문해 주셔도 좋습니다.”

    기관총 쏴대듯 숨가쁘게 열변을 토했던 김순익은 말을 끝내고 연단 아래로 내려왔다. 서노인이 단상으로 올라섰다. 70대의 시골노인 같지 않게 허여멀쑥한 얼굴에 우람한 체구, 경성한복판에 내세워도 손색없을 위풍당당한 모습이어서, 청중들은 위압감 같은 것을 느껴서인 듯 소리나게 군침들을 삼키곤 했다. “여러분, 반갑습니다. 앞길이 9만리같은 여러분의 얼굴을 대하니, 마치 20∼30대의 나 자신을 보는 것 같아 감회가 새롭군요. 나는 거금(距今) 27년전 43세때 ‘법정사 항일투쟁’에 가담했고, 단숨에 관광면 경찰주재소를 박살내고 불지르고 악독한 일경 3명을 생포해서, 죽여버릴까 하다가 상부의 만류로 살려주는 자비를 베풀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가 왜 그때 자비를 베풀었어야 했나 하고 생각하면 치가 떨리곤 하지요. 크나큰 한으로 남아있어요. 에또, 그럼 그 사건이 일어나게 된 배경과 전개과정을 간략하게 말씀드리기로 하겠습니다. 몸이 좀 떨리는군요!” 서노인은 헛기침을 하고 가쁜 숨결을 가라앉힌 다음, 굳어진 얼굴로 잠시 멍하니 서있었다. 27년전 그 불꽃튀는 격파장면이 뇌리에서 되살아나면서, 현기증을 일으킨 때문이었으리라. 잠시후 노인은 정신을 가다듬고는 때묻고 구겨진 얄팍한 노트 한권을 펼쳤다.

    “사건이 일어난 날짜는 1918년(무오년) 9월 19일로 기억됩니다. 이보다 앞의 8월 21일(음력 7월15일) 우란분제(盂蘭盆祭-7월보름 조상의 초혼공양을 하는 불사)가 치러졌는데, 그 자리에서 김연일스님 등 주동자들은 “왜노(倭奴)들이 우리 조선을 강제로 병합한 후 일제관리는 물론 상인들까지 몰려와서 우리 동포를 학대하고 있는데… 우선 첫 번째로 제주도에 거주하는 일본인 관리를 죽이고, 상인을 제주도 밖으로 쫓아내야 한다”라고 선언했던 겁니다.

    이 선언은 속으로만 타오르던 군중들의 가슴속 화약고에 석유를 퍼부은 꼴이 되었지요. 도선마을을 필두로 제주도내 3개면 13개마을 사람들을 자극함으로써 마치 태풍이 휘몰아치듯, 산남(山南)일대를 발칵 뒤집어엎을 셈이었어요. 김연일스님이하 40여명의 지휘부는 성난 군중을 이끌고 전봇대의 전선을 끊어버리면서 서귀포를 향해 벼락치듯 진격을 했는데…도중에 기밀이 새어서, 중무장을 한 기마경찰대 행렬이 새까맣게 몰려오고 있는게 아니겠어요?

    이때 김연일스님은 도대장에게 후퇴하지 말고 맞서싸울 것을 명령했고, 그 자신은 1백여명의 군중을 이끌고 반대방향인 관광면 소재지로 쳐들어간 거예요. 일거에 주재소를 덮쳐 때려부수고 불지르고 일경 3명을 때려잡은게야. 13명의 유치장 구금자를 끄집어냄으로써 나름대로 전과를 올린 셈이었지요. 그런데, 이 사건은 3일동안 계속되는 가운데, 육지부로부터 응원부대가 몰려와서 제주도를 뒤덮는 바람에 군중들은 역부족으로 후퇴할 수밖에…” 서원형노인의 말은 이어져 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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