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이 자리는 의견을 듣기 위해 마련한 자리가 아닙니까? 귀에 거슬리더라도 형님 얘기 끝까지 듣도록 해 주시지요. 형님은 정말 금쪽같은 얘기를 하셨어요. 이제 일본제국주의는 아무리 애처로워도 죽은자식 나이 헤아리기라구요. 민주주의시대가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잖습니까?
우리들은 지금 여명기를 맞고 있는 셈이지요. 저는 ‘선견지명’ 아니 다가오는 거역못할 물결을 받아들일 수 밖에 도리가 없다는 뜻으로 말슴해 주신, 형님이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아버지! 너그럽게 이해하시고, 형님 얘기 계속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지난 봄 농업학교를 졸업한 둘째 아들 영근이 형의 말에 크게 감동한 나머지 노골적으로 형을 두둔하면서, 아버지에게 설득성 발언과 곁들여서 간청을 했다.
하지만 그것은 타는 불에 기름 끼얹은 격으로 진노를 부채질 한 꼴이 되고 말았다.
“너희 형제가 언제부터 한통속이 되어갖고, 이 애비 공탕먹이기로 작정을 했더냐? 농업학교에서 땅 파는 기술이나 배운줄 알았는데, 민주주의가 어떻고 제국주의가 어떻고…시건방지게 너희들이 뭘 안다구…내일 곧 민주주의 시대로 바뀐다 해도 오늘은 오늘인게야. 그냥 뛰어넘을 수는 없어! 두고봐라, 이 애비 말이 맞나 안맞나? 그래, 윤근이 네 말은 결론은 들어보나마나 뻔한 것 아니냐? 애비더러 면장자리 내놓으라는 그런 소리…맞지?”
이종상은 심히 불쾌하고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울화통이 터질 지경인 듯, 목구멍에서 헉헉소리를 내뿜으며 두 아들을 번갈아 노려보는 것이었다. 그렇다해서 주눅이 들고 얼어붙어 갖고 꽁무니 뺄 비열한 형제들이 아니었다.
“아버지도 느끼고 계실 줄 믿습니다만, 지위와 명예라는게 그렇고 그런 것 아닙니까? 얻기도 어렵지만 물러날 대 물러나기란 더더욱 어려운 것이라는 말이 있잖습니까? 면민들 중에서 누가 앞장서서 규탄대회를 열고 폭력을 휘두를는지 모릅니다. 그럴 경우 두렵다기 보다도 더럽고 치사하는 거지요. 헌신짝 내던지듯 팽개쳐 버리는 것이야말로, 굴복이나 패배가 아니고 용기있는 대장부의 처신이 아닌가고 여겨집니다. 명예로운 후퇴라는 뜻이기도 하구요. 개인의 입장도 그렇지만, 가족과 가문을 위해서도 아버지의 결단은 매우 긴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윤근은 홀가분했다. 동생의 응운을 얻어 가슴속 응어리를 풀고나니, 한편으로 송구스럽기도 햇지만 하늘을 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알았다. 못난 애비 가슴에 못을 박고나니 후련하겠구나! 배은망덕에다 불효막심한 놈들 같으니라구! 어서 썩 꺼져! 얘기 끝났으니까. 자네들은 그냥 앉아있구!”
이종상은 와들와들 몸을 떨며 두 아들에게 서릿발 같은 추방령을 내렸다. 그러나 5명의 심복부하들에게는 부드럽고 따뜻한 목소리로, 도와달라는 말대신 앉아있기를 당부했다.
가슴속에서야 두 아들의 시국관에 동의와 공감을 할망정 , 겉으로는 면종복배(面從腹背) 죽으라면 죽는시늉까지도 마다하지 않을 ‘무골호인’같은 부하들임을 확인하자, 이종상은 그 아부형 무골호인들이 더없이 귀엽고 기특하게 여겨졌다.
두 아들이 쫓겨난 뒤, 이종상은 자신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진다해도 면장직을 한사코 지키겟다는 굳은 의지를 5명의 부하들에게 넌지시 표명을 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저희들은 면장님께서 혹시 아드님들의 요구대로 면장직을 내놓으실까봐서,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모릅니다. 저희들도 힘닿는데까지 싸울터이오니, 절대로 약해지시지 말구 끝까지 맞대응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승리해야 합니다”
상급자로 보이는 40대 사나이가 흥분된 목소리로 맞장구를 치자, 4명의 30대 사나이들도 과잉충성한답시고 덩달아 합창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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