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대하소설 황제의 싸움터

    문화 / 시민일보 / 2004-01-05 17:3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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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보는 제주 4.3 民亂
    “…나더러 상권(商權)을 독점했다구? 그건 맞는 말이오. 서푼어치 장사지만 상권이라면 상권이랄 수 있겠지. 그나마 얻어 먹겠다고 군침 흘린 얌체들이 많았으니까. 그런데, 내가 상권을 독점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일본인들이 가로챘었을 터인 바 그럴 경우 행패가 어떠했을 것인가를 생각이나 해봤소? 거창하게 ‘플랑카드’ 치켜들고 쳐들어오다니, 그따위 엄포에 겁이나서 ‘감투와 재산 몽땅 바칠테니 제발 목숨만 살려주십시오!’하고, 손이 발이 되도록 굽실거릴 줄 알았나? 과도기가 무법천지란 뜻은 아니지 않소. 감투와 재산을 빼앗기 위해 면민들이 들고일어나 내 가슴에 칼을 들이대려고 했다는 사실은 매우 부끄럽고 서글픈 일이오. 그 정도 그 수준밖에 안되는 불쌍한 군중들이여! 우리 집 창고안에는 전쟁이 끝나기 전에 면사무소에서 맡겨놓은 1500여가마의 양곡이 보관되어 있소. 나는 면장직권으로 그것을 면민들에게 고루 나눠줄 것을 명예를 걸고 약속하겠소. 그리고 나는 면장직을 팽개치고 관광면을 떠날 것이오. 날강도와 걸인 같은 무리들이 들끓고 있는 관광면에, 더 이상 머물러 있어야 할 이유도 흥미도 없기 때문이오. 여러분! 그 썩어빠진 배타정신을 버리시오. 그리고 벌떼같이 들고 일어나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경거망동을 자제하시오! 자, 내 얘긴 끝났소. 모두들 물러가시오! 쉽게 목적을 달성했으니까 가벼운 발걸음으로!”

    아래턱에 피투성이가 된 이종상이 게걸거리는 목소리로 떠들어대다 시큰둥하니 담장 아래로 내려섰다.

    “잠, 잠깐 여러분!”

    미군과 경찰을 이끌고 온 책임자로 보이는 미군대위가 담장위로 뛰어올랐다.

    “여러분, 지금 기분이 어떻신지요? 이종상 면장이 어떤 인물이라는게 인제 알 것 같소? 그분은 여러분이 폭도로 변하기 전에 여러분을 구제해 주신 생명의 은인이 아닐까요? 여기 동참한 무술인들과 많은 경찰들은 육지부에서 지옥으로 갈 뻔한 여러분을 살려주기 위해 달려온 고마운 사람들이오. 제주도는 예부터 민란(民亂)의 고장으로 정평이나 있는 독특한 지방이라는 말을 들었소. 이제 민란시대는 끝났소. 세계 제1의 막강한 미군이 주둔해 있고, 일단 유사시엔 육지부에서 응원부대가 득달같이 달려오게되면 그릇된 민의(民意) 눈 ‘바람앞의 등불‘일 수 밖에 없을 것이오. 배타적인 고아기질 반항적인 수인(囚人)습성들을 뜯어고치는 것만이 전화위복이 아닌가 싶소.
    민주주의 첫걸음은 매스컴을 바탕으로 한 언론이라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는 점을 엄중히 일깨워두고 싶소. 이상이오. 조용히 해산해 주시오!”

    미군대위는 신나게 떠들어대다 밑천이 동났음을 알고 후딱 담장 아래로 뛰어 내려왔다.

    바로 그때였다.

    관광마을 북쪽, 그러니까 한라산 터 지축을 뒤흔드는 총소리가 한참동안 울려퍼졌다.

    도대체 누가 쏘는 총소리일까?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뛴다고, 중무장을 한 군·경들 앞에서 간덩이가 콩알만큼 오므라든 군중들은 같은 패거리의 군·경이 진로를 가로막고 기습작전을 펴자는게 아닐까 싶어 모두들 공포에 떨었다.

    그러나 눈앞의 미군과 경찰들이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공격태세를 갖추고 있는 것을 보고, 군중들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한 패거리가 아님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제주도내 전역에 걸쳐서 일어나느냐 어떻냐를 가름할 ‘관광면장 타도’운동이 무장군·경의 방해로 물거품이 되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가슴아프게 생각한 사람은 서병천이었다.

    하늘이 무너지고 제주도가 송두리째 바다에 침몰되는 한이 있어도 버릴 수 없는 꿈, 그것은 ‘황제의 꿈’이었다.

    서병천은 그 꿈을 제주도에서 이루어야 했으므로, 제주도를 떠날 수 없었다.

    그 신호를 서병천은 한라산 기슭에서 숨가쁘게 울려퍼진 총소리로 대신 한 셈이었다.

    ‘관광면장 타도사건’은 멀잖은 장래에 일어날 ‘제주대항쟁’의 밑그림이 되어야 할 터인데…. 고정관·조용석·이만성 등은 부랴부랴 고향을 등지고 경성으로 떠날 채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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