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INK:1} 해마다 이맘때 흐드러지게 피는 개나리꽃을 보노라면 30년전 고려대 울타리를 에워 싸고있던 개나리꽃이 생각난다.
1975년 4월8일, 박정희 정권은 유신 철폐 시위가 극에 다다르자 고려대 한 학교를 대상으로 대통령 긴급조치 7호를 발동하고 수도경비사령부 병력을 고려대에 진주시켰다.
착검한 군인들이 학교를 점령했고, 우리는 모두 우리의 보금자리에서 쫓겨나와 학교 앞 막걸리집을 전전하며 울분을 토로했다.
그때 들어갈 수 없는 캠퍼스를 지나치며 눈에 들어오던 풍경-병영이 된 교정, 그리고 더할나위없이 화사하게 피어있던 개나리...
80년 5월에도 우리는 그 묘하디 묘한 콘트라스트를 경험했다.
광주에서 수백 수천의 시민이 군인들에 의해 피투성이가 되고 있을 때 이 나라 산천은 어디 하나 빼놓지 않고 노랗게 빠알갛게 꽃으로 뒤덮여 있었다.
아! 그 시절 가슴속 깊이 파고들던 어찌 해 볼 수 없었던 처연함이여!
총칼에 맞섰던 젊음들과 그들의 피로 말미암아 이제 이 땅에는 총과 칼이 발 디딜 공간은 없어졌고, 해마다 피어나는 꽃을 바라보며 그때를 지긋이 회상하곤 한다.
박정희는 72년 유신을 발동해 영구집권의 길로 성큼 들어섰다.
전대미문의 유신체제가 들어서자 이 나라 전체가 꽁꽁 얼어붙었고, 대한민국은 ‘거대한 감옥’처럼 변해갔다. 박정희 유신체제에 대한 거부나 비판은 곧 죽음과 몰락을 의미했다.
다방에서 술집에서 끼리끼리 모여 앉아 시국담을 나누면서도 혹 곁에서 누가 듣지나 않을까 두리번거려야 했다. 잘못 걸리면, 말 한마디 잘못하면 이 사회에서 격리되고 패가망신하게 돼 있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이 터졌다.
유신에 반대하는 대학생 연합 조직 사건이라는 발표가 서슬퍼렇게 나왔다.
갓 대학에 들어간 우리는 숨을 죽이며 추이를 지켜보았다. 또한 우리는 이 같은 시대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에 대한 혹독한 고민을 해야 했다.
74년 말 동아일보 광고 탄압 사태가 벌어 졌다.
권력은 권력에 비판적이던 동아일보에 광고를 싣지 못하게 전방위 압력을 가했다. 광고면이 백지로 나왔다. 눌려있던 민심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동아일보를 격려하는, 자유언론을 지지하는 목소리들이 ‘격려광고’로 분출했다.
당시 동아일보 광고면을 보면 우리 국민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독재체제에 대한 혐오가 어느 정도였는지 여실히 드러난다.
75년 3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 자유언론 실천운동의 봉화가 타올랐다.
독재권력의 압력에 투항하려는 사주측에 맞서 기자들이 분연히 차고 일어선 것이다.
결국 동아와 조선은 현실안주의 길을 택했고, 기자 백 수십여 명이 일자리를 잃고 거리로 나서게 된다.
상아탑에 있던 우리는 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들이 흔히 쓰던 표현 그대로를 빌자면 국가가 백척간두의 위기에 봉착해 있는데 학생이라고 해서 강의실과 도서관을 지키고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민족이념연구회라는 이념서클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나와 동기생인 최규엽(독문과·현 민주노동당 최고위원)이 눈을 맞추었다. 써클실 옆 칸의 청년문제연구회 소속이던 설훈(사학과·전 국회의원)과 입을 맞추었다.
우리는 거사일을 3월31일로 잡았다.
유인물 준비조, 배포조, 현장지휘조 등 조직을 짰다. 3월31일 교정은 긴장감에 휩싸여 있었다. 우리는 준비한 대로 각자 뛰었다. 대강당에는 입추의 여지없이 학생들로 가득 찼다. 터질 것 같은 긴장감을 느꼈다.
73학번(당시 3학년)의 도천수(철학과·정당인), 최봉영(철학과·인쇄업), 박구진(경영학과·변호사), 권순성(경영학과·회사원) 등이 연단에서 불을 뿜었다. “유신철폐 독재타도”의 사자후였다.
74학번에서 나와 최규엽, 김관회(경제학과·작고) 등이 민주주의의 제단에 몸을 던지자는 선동적 연설을 했다.
분위기는 달아올랐다. 2000명이 넘는 학생들이 스크럼을 짜고 교문 쪽을 향했다. 목이 터져라 “유신철폐 독재타도”를 외쳤고 안암골은 우리의 함성으로 요동쳤다.
경찰은 교문을 철통 봉쇄했다.
치열한 투석전이 벌어졌고 최루탄이 난무했다. 교문 밖 진출은 결국 무산됐고 접전은 오후 들어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시위를 주도한 우리는 일단 잠복했다.
경찰은 눈이 벌개 주동자 검거에 나섰다. 4월초 대부분의 주동 학생들이 연행돼 성북경찰서 정보과로 잡혀갔다.
우리는 성북서 유치장에 들어앉아 4월7일 제2차 교내 시위 소식을 들었다. 고려대가 반유신 투쟁의 핵심기지가 되어가고 있음을 들으며 우리는 유치장 안에서 쾌재를 불렀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인 4월8일 박정희 정권은 고려대에 긴급조치 7호를 내려쳤다.
4월13일 21명의 학생이 제적됐고, 5월10일 추가로 9명이 제적 처분됐다.
우리는 이때로부터 80년 서울의 봄 때 학교에 돌아가기까지 5년 동안 참담한 청춘을 보냈다.
박정희는 영원토록 권력을 휘두를 것 같았고, 우리네 청춘은 이렇게 버림받은 상태로 희망 없는 세월을 보낼 것 같았다.
우리는 어깨를 짓누르는 중압감, 생활고 속에서 간간이 만나 그래도 한 줄기 희망의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1975년 4월8일, 박정희 정권은 유신 철폐 시위가 극에 다다르자 고려대 한 학교를 대상으로 대통령 긴급조치 7호를 발동하고 수도경비사령부 병력을 고려대에 진주시켰다.
착검한 군인들이 학교를 점령했고, 우리는 모두 우리의 보금자리에서 쫓겨나와 학교 앞 막걸리집을 전전하며 울분을 토로했다.
그때 들어갈 수 없는 캠퍼스를 지나치며 눈에 들어오던 풍경-병영이 된 교정, 그리고 더할나위없이 화사하게 피어있던 개나리...
80년 5월에도 우리는 그 묘하디 묘한 콘트라스트를 경험했다.
광주에서 수백 수천의 시민이 군인들에 의해 피투성이가 되고 있을 때 이 나라 산천은 어디 하나 빼놓지 않고 노랗게 빠알갛게 꽃으로 뒤덮여 있었다.
아! 그 시절 가슴속 깊이 파고들던 어찌 해 볼 수 없었던 처연함이여!
총칼에 맞섰던 젊음들과 그들의 피로 말미암아 이제 이 땅에는 총과 칼이 발 디딜 공간은 없어졌고, 해마다 피어나는 꽃을 바라보며 그때를 지긋이 회상하곤 한다.
박정희는 72년 유신을 발동해 영구집권의 길로 성큼 들어섰다.
전대미문의 유신체제가 들어서자 이 나라 전체가 꽁꽁 얼어붙었고, 대한민국은 ‘거대한 감옥’처럼 변해갔다. 박정희 유신체제에 대한 거부나 비판은 곧 죽음과 몰락을 의미했다.
다방에서 술집에서 끼리끼리 모여 앉아 시국담을 나누면서도 혹 곁에서 누가 듣지나 않을까 두리번거려야 했다. 잘못 걸리면, 말 한마디 잘못하면 이 사회에서 격리되고 패가망신하게 돼 있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이 터졌다.
유신에 반대하는 대학생 연합 조직 사건이라는 발표가 서슬퍼렇게 나왔다.
갓 대학에 들어간 우리는 숨을 죽이며 추이를 지켜보았다. 또한 우리는 이 같은 시대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에 대한 혹독한 고민을 해야 했다.
74년 말 동아일보 광고 탄압 사태가 벌어 졌다.
권력은 권력에 비판적이던 동아일보에 광고를 싣지 못하게 전방위 압력을 가했다. 광고면이 백지로 나왔다. 눌려있던 민심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동아일보를 격려하는, 자유언론을 지지하는 목소리들이 ‘격려광고’로 분출했다.
당시 동아일보 광고면을 보면 우리 국민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독재체제에 대한 혐오가 어느 정도였는지 여실히 드러난다.
75년 3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 자유언론 실천운동의 봉화가 타올랐다.
독재권력의 압력에 투항하려는 사주측에 맞서 기자들이 분연히 차고 일어선 것이다.
결국 동아와 조선은 현실안주의 길을 택했고, 기자 백 수십여 명이 일자리를 잃고 거리로 나서게 된다.
상아탑에 있던 우리는 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들이 흔히 쓰던 표현 그대로를 빌자면 국가가 백척간두의 위기에 봉착해 있는데 학생이라고 해서 강의실과 도서관을 지키고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민족이념연구회라는 이념서클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나와 동기생인 최규엽(독문과·현 민주노동당 최고위원)이 눈을 맞추었다. 써클실 옆 칸의 청년문제연구회 소속이던 설훈(사학과·전 국회의원)과 입을 맞추었다.
우리는 거사일을 3월31일로 잡았다.
유인물 준비조, 배포조, 현장지휘조 등 조직을 짰다. 3월31일 교정은 긴장감에 휩싸여 있었다. 우리는 준비한 대로 각자 뛰었다. 대강당에는 입추의 여지없이 학생들로 가득 찼다. 터질 것 같은 긴장감을 느꼈다.
73학번(당시 3학년)의 도천수(철학과·정당인), 최봉영(철학과·인쇄업), 박구진(경영학과·변호사), 권순성(경영학과·회사원) 등이 연단에서 불을 뿜었다. “유신철폐 독재타도”의 사자후였다.
74학번에서 나와 최규엽, 김관회(경제학과·작고) 등이 민주주의의 제단에 몸을 던지자는 선동적 연설을 했다.
분위기는 달아올랐다. 2000명이 넘는 학생들이 스크럼을 짜고 교문 쪽을 향했다. 목이 터져라 “유신철폐 독재타도”를 외쳤고 안암골은 우리의 함성으로 요동쳤다.
경찰은 교문을 철통 봉쇄했다.
치열한 투석전이 벌어졌고 최루탄이 난무했다. 교문 밖 진출은 결국 무산됐고 접전은 오후 들어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시위를 주도한 우리는 일단 잠복했다.
경찰은 눈이 벌개 주동자 검거에 나섰다. 4월초 대부분의 주동 학생들이 연행돼 성북경찰서 정보과로 잡혀갔다.
우리는 성북서 유치장에 들어앉아 4월7일 제2차 교내 시위 소식을 들었다. 고려대가 반유신 투쟁의 핵심기지가 되어가고 있음을 들으며 우리는 유치장 안에서 쾌재를 불렀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인 4월8일 박정희 정권은 고려대에 긴급조치 7호를 내려쳤다.
4월13일 21명의 학생이 제적됐고, 5월10일 추가로 9명이 제적 처분됐다.
우리는 이때로부터 80년 서울의 봄 때 학교에 돌아가기까지 5년 동안 참담한 청춘을 보냈다.
박정희는 영원토록 권력을 휘두를 것 같았고, 우리네 청춘은 이렇게 버림받은 상태로 희망 없는 세월을 보낼 것 같았다.
우리는 어깨를 짓누르는 중압감, 생활고 속에서 간간이 만나 그래도 한 줄기 희망의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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