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8월14일 고 김학순 할머니가 교회여성연합회 사무실로 찾아 왔다가 방금 나갔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방금 나갔다는 할머니를 찾아서 숨이 차게 뛰어가서, 다시 할머니를 사무실로 모셔왔다. 내가 한국여성단체연합의 여성운동가로서 교회여성단체연합 등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가지고 막 일을 시작할 때였다.
나와 운영애 교회여성연합회 총무는 김학순 할머니에게 내일이 8.15인데 텔레비전 앞에서 기자회견을 해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할머니는 너무나 흔쾌히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였고 부랴부랴 기자회견을 준비하여 최초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이 전파를 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장면을 보고, 숨죽여 지내던 피해자들이 50년만의 지옥 같은 침묵을 깨고 하나 둘씩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해방이 되고 수많은 일제시대 억압과 피해에 대한 연구가 있었고,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이 있었다. 그러나 유독 일본군 위안부 문제만이 거의 45년 동안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그동안 20만명에 해당하는 이 여성들에게 해방이 되었지만 해방은 오지 않았던 것이다. 해방된 조국의 정부나 학자들이나 그리고 수많은 국민들이 이 문제를 애써 침묵 속에 가둬 두려고 하였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나는 수많은 사람들, 일본 사람들로부터도 왜 이 문제가 이제야 거론되느냐고 질문을 많이 받았다.
여성운동가들이 중심이 되어 이 문제의 진상규명을 위해 나섰을 때, 한국의 꽤 양심적인 지식인들조차 “왜 우리나라 여성들의 부끄러운 과거를 들추어내느냐”고 반대하였다. 여성의 정조가 지켜지지 못한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는 이 완고한 가부장제가 피해자들의 입을 틀어막았고, 지식인들의 눈을 멀게 하였다. 그리고 그 동안 일본 정부와 경제협력이라는 미명 아래 손을 잡은 독재 정권이 이 문제를 덮어 두려고 했던 것이다.
네덜란드의 피해자를 국제회의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이 여성은 고상하게 늙었고 딸과 사위까지 동행하고 세미나에 왔었다. 그녀는 한이 없었다. 네덜란드 여성을 잠시나마 성노예로 만든 그 죄목 때문에 일본군 지휘자는 전후 국제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죽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와 아시아의 여성들 20만명 이상을 성노예화한 죄는 아직도 물어 지지 않고 있으며 한국정부도 제대로 된 배상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지 있지도 못하다.
나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해결에 참여하면서 비로소, 역사를 제대로 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다. 여성의 인권에 대한 제대로의 인식이 결여되었을 때, 가장 비인간적인 억압을 당한 수많은 피해자들의 삶이 또 다시 해방된 조국에서도 무시되고 짓밟힐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지옥과 같이 어두운, 강요당한 침묵을 깨고, 용감하게 첫 증언에 나서주셨던 고 김학순 할머니의 명복을 빈다.
나와 운영애 교회여성연합회 총무는 김학순 할머니에게 내일이 8.15인데 텔레비전 앞에서 기자회견을 해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할머니는 너무나 흔쾌히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였고 부랴부랴 기자회견을 준비하여 최초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이 전파를 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장면을 보고, 숨죽여 지내던 피해자들이 50년만의 지옥 같은 침묵을 깨고 하나 둘씩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해방이 되고 수많은 일제시대 억압과 피해에 대한 연구가 있었고,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이 있었다. 그러나 유독 일본군 위안부 문제만이 거의 45년 동안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그동안 20만명에 해당하는 이 여성들에게 해방이 되었지만 해방은 오지 않았던 것이다. 해방된 조국의 정부나 학자들이나 그리고 수많은 국민들이 이 문제를 애써 침묵 속에 가둬 두려고 하였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나는 수많은 사람들, 일본 사람들로부터도 왜 이 문제가 이제야 거론되느냐고 질문을 많이 받았다.
여성운동가들이 중심이 되어 이 문제의 진상규명을 위해 나섰을 때, 한국의 꽤 양심적인 지식인들조차 “왜 우리나라 여성들의 부끄러운 과거를 들추어내느냐”고 반대하였다. 여성의 정조가 지켜지지 못한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는 이 완고한 가부장제가 피해자들의 입을 틀어막았고, 지식인들의 눈을 멀게 하였다. 그리고 그 동안 일본 정부와 경제협력이라는 미명 아래 손을 잡은 독재 정권이 이 문제를 덮어 두려고 했던 것이다.
네덜란드의 피해자를 국제회의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이 여성은 고상하게 늙었고 딸과 사위까지 동행하고 세미나에 왔었다. 그녀는 한이 없었다. 네덜란드 여성을 잠시나마 성노예로 만든 그 죄목 때문에 일본군 지휘자는 전후 국제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죽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와 아시아의 여성들 20만명 이상을 성노예화한 죄는 아직도 물어 지지 않고 있으며 한국정부도 제대로 된 배상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지 있지도 못하다.
나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해결에 참여하면서 비로소, 역사를 제대로 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다. 여성의 인권에 대한 제대로의 인식이 결여되었을 때, 가장 비인간적인 억압을 당한 수많은 피해자들의 삶이 또 다시 해방된 조국에서도 무시되고 짓밟힐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지옥과 같이 어두운, 강요당한 침묵을 깨고, 용감하게 첫 증언에 나서주셨던 고 김학순 할머니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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