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첫 걸음으로

    기고 / 시민일보 / 2005-10-11 20: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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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희의원 구논회
    {ILINK:1} 인간으로 태어나서 일정 기간 학업을 마친 이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직업을 갖기 마련이다. 생활환경에 따라서 학업 도중에 사회에 뛰어드는 이도 있을 것이다. 자신에 대한 만족감, 성취감, 권력, 경제력 등 직업이란 것은 우리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의미한다. 어린 시절부터 간직해온 꿈, 우리는 그 꿈이 현실로 다가오길 바란다.

    대통령, 과학자, 화가, 정치인, 판사, 변호사, 의사, 간호사, 선생님……. 누구나 한 번쯤 가져보았을 꿈이다. 요즘 들어서는 연예인이 되고자 하는 아이들도 많다고 하지만 말이다. 내가 젊은 시절을 보냈던 때에는 직업이란 필수였다. 직업이 없으면 당장 앞날이 깜깜해지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 실업률이 증가하고 있는데, 통계청의 자료를 보면 2002년 1월의 실업률은 3.7%이다. 2001년 9월부터 점차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물론 실업률에 포함된 실업자들은 대부분 취직을 희망하지만 직장을 가지지 못한 경우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 속에는 일하기 싫어하는 이도 끼어 있다는 소식을 접하다 보면 아쉬움을 느낀다. 자신이 노동을 제공하고 정당하게 돈을 번다는 것은 의미가 참 크다. 땀 흘려 단돈 천 원이라도 벌어 보면 사람이 달라질 수 있다.

    나에게 직업이란 꿈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은 아니었다. 내 자신에 대한 만족감이나 성취욕을 위한 것도 아니었다. 필수적인 것이었다. 없으면 생존 자체가 위협받는 그런 것 말이다. 청년 가장이었던 나는 언제나 두 개 이상의 직업을 가졌다. 내 또래의 아이들처럼 학생이란 신분을 유지했고 가족을 위해 돈을 벌며 집안일을 도왔다.

    이것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줄곧 지켜오던 것이었다. 학교에서 끝나기가 무섭게 집을 향해 달려온다. 그리고는 책가방을 마루에 던져둔다. 그 순간부터 난 우리 집에서 잡다한 일은 다 하는 그런 존재가 되는 것이다. 낫을 들고 논을 향한다. 잘 자란 꼴들을 한번 훑어서는 소 여물통을 채워준다. 그 일이 끝나면 넓은 밭고랑 사이를 토끼걸음으로 걸어다니며 호미질을 한다. 봄이면 모를 심고, 여름이면 논에 가서 피를 뽑고, 가을이면 들녘에서 벼를 베고 타작을 했다. 농사일이란 시작은 있지만 흰 눈이 세상을 뒤덮은 뒤에도 끝날 줄 몰랐다. 겨울이면 새끼를 꼬아 놓아야 했고, 두엄을 장만해 두어야 했다. 그밖에도 과일나무 가지치기, 괭이질……. 쉼없이 일손을 돕다 보면 어느덧 일 년은 쉬이 지나가기 마련이었다.

    중학교 시절까지 그러한 생활을 했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는 고향을 떠나 대전에서 머무는 바람에 부모님 일을 도와드릴 수 없게 되었다. 처음으로 학창 생활 자체만을 만끽하며 살았다. 그러다가 대학시절부터 다시 두 개의 직업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대학 1학년 때 아버지가 세상을 등지신 뒤로는 틈만 나면 시골로 갔다. 농사일을 도맡아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오래지 않아 어머니마저 우리 곁을 떠나셨다. 부모님의 잇따른 죽음으로 나는 일찍부터 가장으로서의 무거운 짐을 짊어져야 했다.
    나는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포장마차를 사서 동네에서 장사를 하고, 사전을 비롯한 책들을 짊어지고 다니면서 팔았다. 당구장을 임대하여 장사도 해보고, 저녁나절부터 술을 나르며 웨이터 역할도 했다. 벽돌공장에서 보조로 일도 하고, 시청에서 임시직으로 일하고, 길거리 한복판에서 좌판 벌여 놓고 노점상도 했다. 아르바이트 일이 없을 때에는 서해 바다에 가서 꼬막이나 게를 잡아 시장에서 팔기도 하고, 예산 쪽에 가서 과수원에서 일도 했다. 일용 근로자로 공사판에서 지게를 짊어지고 흙도 나르고, 시멘트도 날랐다. 그렇게 해서 대학을 졸업했다. 학교를 다니는 날보다 삶의 현장에서 돈을 벌고 있는 날이 더 많았다.

    대학 졸업식 날, 담당 교수님이 나를 불러 대학을 백일은 다녔냐고 물으셨다.
    얼마나 우스운 질문인가? 정규 대학교의 학기는 모두 8학기이다. 한 학기가 4개월, 토요일과 일요일을 비롯해 쉬는 날을 제외해도 100여 일이다. 그런데 나는 8학기 동안에 100일 남짓 다닌 것이다. 남들은 800일 가까이 다니는 대학을 그렇게 다녔으니 학점이야 뻔했다. 졸업장만 간신히 받을 정도였다. 나는 돈을 벌어야 했다. 당장 내 손아귀에 돈이 없으면 동생들과 함께 굶어야만 했다. 내 사전에는 방학이란 단어도, 주말이란 단어도, 휴식이란 단어도 없었다. 일 년 365일이 일하는 날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후회스럽거나 아쉬워한 적도 없다. 열심히 살았으니까 말이다.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현재 상황이 암울하다고 쓰러졌다면 과연 지금의 내가 있을까? 그만큼 열심히 살았기에 현재가 있지 않겠는가.

    지금까지 내가 걸어왔던 길, 나의 삶은 어쩌면 내가 너무나 평범해서 겪은 것들인지도 모르겠다. 대단치도 않은 삶의 고비들을 글로 엮어 여러분의 눈을 어지럽히지나 않았는지 우려도 된다. 하지만 너무 편한 것만 좇아 살아가는 요즘 세태를 보며, 비록 나의 삶이 모범은 아닐지언정 나를 딛고 오르는 발판쯤은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세상 속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기 마련이다. 큰 고비를 견디고 나면 더욱 뚜렷한 존재 이유가, 삶의 의미가 보인다.

    큰 고통이 있어야 큰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것을 나도 암 투병이라는 지난 한 과정을 겪고 나서야 알았다. 삶의 과정에서 고통은 정면 돌파를 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은 어제를 증명하고, 또 내일은 오늘을 증명해 보인다고 한다. 길지 않은 인생, 나는 오늘도 끊임없는 열정과 의지로 최선의 삶을 살자고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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