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위원장과 열하일기

    기고 / 시민일보 / 2006-01-25 20: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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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양석(한나라당 부대변인)
    {ILINK:1}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지난 10일부터 18일까지 중국을 방문하였다. 김 위원장은 중국 남부 경제특구 지역을 둘러보고 ‘참으로 깊은 감명과 인상’, ‘큰 감동’이라는 최상급 수사를 써가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김 위원장이 향후 또 다른 ‘경제 개방 및 개혁’ 조치를 취할 가능성을 높여주는 대목이다. 북한의 중국 배우기가 본격화 된 느낌이다.
    우리나라의 중국 배우기는 지금부터 226년을 거슬러 올라가 연암 박지원으로부터 시작된다.
    연암 박지원은 44세이던 1780년(정조 5년) 5월25일부터 10월27일까지 삼종형 명원(明源)이 청나라 고종 건륭제의 칠순 잔치 진하사로 베이징[北京]에 가게 되자 자제군관(子弟軍官) 자격으로 청(淸)나라를 방문한다. 청제국은 건륭제 치하에서 영토가 최대로 팽창했으며 번영이 최고조를 맞고 있었다. 연암에게 세계의 중심이었던 북경에 도착하는 날 연암은 도시외각을 흐르는 강을 덮은 대규모 선단을 보고 감탄한다. 강에는 곡식 300만석을 실은 큰배 10만척이 빽빽이 들어선 것을 보고 그 장관이 萬里長城의 웅장함과 견줄 만 하다고 했다.
    북경에서 연암은 南堂을 방문한다.
    연암은 남당에서 색상이 다채롭고 사실적이며 원근감이 구사된 서양의 종교화를 보고 충격을 받는다. 연암은 북경에서 중국 전역의 귀한 서적이 다 모인 유리창을 방문하여 지식과 정보의 바다에 빠져 든다. 연암은 이곳에서 의학서적에 관심을 갖고 필요한 부분은 메모한다. 당시 연암이 살던 조선의 고향에는 병이 나도 치료받을 의원이나 약도 없었기 때문 이었을 것이다. 연암은 귀국한 이후 열하일기(熱河日記)의 저술에 전력을 기울였다. 열하일기는 단순한 일기가 아니라, 중국의 풍속·제도·문물에 대한 소개와 조선의 제도·문물에 대한 비판 등도 들어 있는 문명 비평서였다.
    열하일기를 통해 연암은 생산력의 발전을 가장 중요시 했고 이를 위하여 한전법에 의한 농업생산관계의 개혁을 제기했다. 한전법(限田法)은 전국의 토지면적과 호구를 조사하여 1호당 평균경작면적을 국가가 제정하고 누구든지 그 이상으로 토지를 소유하는 것을 법률적으로 제한하는 것이며, 국가가 확고한 화폐정책을 실시하여 상평통보의 발행을 합리적으로 조절할 것과 은(銀)을 화폐로 사용할 것을 주장했다. 또 생산품이 전국적 규모로 유통되지 못하기 때문에 수공업도 농업도 발전하지 못하므로, 우선 교통을 발전시켜서 생산품이 전국적 규모로 유통되도록 할 것을 주장하는 한편 광범위하게 수레와 선박을 이용하여 국내 상업과 외국무역을 촉진할 것도 제기했다. 그는 또 이러한 개혁의 일차적인 책임이 지식인들에게 있음을 강조하면서, 이용(利用)이 있은 다음에야 가히 후생(厚生)이 있고 후생이 있은 다음에야 가히 덕(德)을 바로 잡을 수 있다는 이용후생(利用厚生) 위주의 새로운 사고방식을 종래의 人倫위주의 사고방식에 대체함으로써, 한국 사상사에서 하나의 이정표를 세웠다.
    청나라 방문을 통해 새로운 문물과의 접촉은 연암 박지원의 사상체계에 큰 영향을 주었고 이를 계기로 그는 實事求是와 經世致用의 학문인 실학연구에 몰두한다.
    실학 중에도 청나라의 앞선 문물을 받아들여 나라를 부강하게 해야 한다는 北學이 그의 방법론이었다. 연암의 친구이자 제자인 초정 박제가가 쓴 북학의는 18세기 후반 위기에 직면한 조선왕조의 만성적 질병을 치유하려면 중국을 배워야 한다는 (北學)뜻에서 쓰인 책이다.
    연암이 중국을 방문한 시기에 조선이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는 위기의식을 가졌던 듯하다. 정조치하의 조선은 문예 부흥기였으나 사회는 닫혀 있었고 지식인은 유교 이데올로기에 도취되어 국기와 백성은 빈곤하고 후진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정조는 개혁군주였으나 개혁이 성공하지는 못했다. 실학자들의 경세론을 경청하기는 했지만 이론을 실천해 국가를 개혁하는 단계에 이르지는 못했다. 1800년 정조가 죽자 조선은 반동으로 돌아섰고 개혁의 싹은 짓밟혔으며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연암 박지원이 청나라의 선진 문명을 보고 돌아온 지 226년이 지난 지금 중국을 배우려는 북한의 상황은 당시의 조선의 실정과 너무 흡사하다.
    북한주민의 가난과 영양실조 문제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며 금년 양력설에는 관례적으로 해오던 술 배급과 배려 전기도 없었다고 한다. 또 외교적으로는 북핵 문제와 위조 달러 문제로 미국의 금융제재를 받고 있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북한을 발전시키는 해법은 226년전 연암 박지원이 조선을 발전시키기 위해 제시한 실사구시 정신을 실천하는 것 외에는 없다. 김 위원장의 중국 배우기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3년전인 1983년 처음으로 중국의 상하이 등을 방문하고 귀국하여 노동당 중앙위원회에서 “이제 중국 공산당에는 사회주의도 공산주의도 없다. 있는 건 수정주의뿐”이라고 비난했다.
    당시 김 위원장이 수정주의라고 비난한 덩샤오핑(鄧小平)의 실용주의 노선은 흑묘백묘론으로 잘 알려졌을 뿐만 아니라 求是(實事求是에서 따옴)라는 중국 공산당의 기관지를 발간해 오고 있는 데서도 그 중요성을 알 수 있다. 김 위원장도 이번 방문시 “조·중 쌍방이 서로 배우고 경험을 교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제는 실천이다. 김 위원장의 중국배우기가 진정으로 성공하여 북한을 가난과 기아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는 실사구시에 의한 해법을 제시한 열하일기를 읽고 실천하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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