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INK:1} 5.31 선거를 앞두고 매니페스토(manifesto)란 단어가 화제다. 여야 할 것 없이 너도나도 매니페스토를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이 자치단체의 발전을 위해 과연 옳기만 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솔직히 의문을 갖고 있다.
이런 의문을 갖는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리더의 상상력을 제한하는 족쇄로 작용할 것이란 우려 때문이다.
창조적 상상력의 산물인 새로운 공약은, 그것이 당대에 곧바로 현실화 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어느 누군가의 벤치마킹에 의해, 아니면 강력한 추진력을 가진 또 다른 리더에 의해 언제든 현실화 될 수 있고, 이를 통해 우리는 보다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 때문이다.
매니페스토(정책강령)란, 선언 또는 성명서의 의미인데, 현재는 정당이 내거는 공약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종래의 선거공약과는 달리 ‘사후 검증 가능한 명확한 공약’을 말한다.
라틴어의 ‘손(manus)’과 ‘치다(fendere)’가 합성되어 ‘손으로 느낄 만큼 명확히 하다’는 의미로 파생되어 정치용어가 되었다는 설이 유력한 매니페스토가 정치적 선언의 의미로 사용하게 된 것은 1848년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에서 독일어로 쓰여진 ‘manifest’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현재 세계에서 일반적으로 쓰이고 있는 매니페스토는 ‘이탈리아 공산당 선언’에서 사용된 이탈리아어의 ‘manifesto’라고 한다.
영국에서는 정당에서 공표하는 정책강령을 매니페스토라고 해서 정책의 수치 목표, 실시 기한, 재원, 방법 등 구체적인 정권공약의 의미로 쓰여 왔다.
일본에서도 영국을 모델로 하여 1998년 통일지방선거 때에 처음으로 매니페스토가 선을 보인 이래, 2003년의 공직선거법 개정에 의해서 보궐선거를 제외한 국정선거에서는 정당이 매니페스토를 선거기간 중에 배포할 수 있게 되어 2003년 11월9일 총선에서는 각 당이 매니페스토를 작성하기도 했다.
2005년 토쿄지방의회의원선거에서 민주당이 발표한 ‘토쿄 매니페스토 2005’를 시발로 하여 로칼 매니페스토의 움직임이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있다고 한다.
문제는 그동안 공약(空約)에 지쳐왔던 많은 유권자들 입장에서야 충분히 공감한다고 하더라도, 후보자들에게 그것이 최고의 선(善)인양 요구하는 것이 과연 능사인가 하는 점이다.
구체적 수치와 각종 데이터 등을 필요로 하는 만큼, 가장 신뢰성 있는 데이터에 상시 접근할 수 있는 현직 후보자에게만 특히 유리하다는 문제점과 함께, 리더의 상상력을 지나치게 제한하는 역효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는 비판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람들은 ‘미래는 상상력의 차이가 승패를 가른다’는 말을 의심하지 않는다. 무모하다고 할 정도로 비판받았던 한 갱의 상상력이 쓸모없는 황무지를 세계최고의 도박과 관광의 도시 라스베이거스로 변모시켰고, 동전 한 닢에서 희망을 발견한 한 인간의 거대한 상상력이 엄청난 금액의 선박건조를 수주해 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상상력은 지식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던 아인슈타인의 혜안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진정한 리더는 미래에 초점을 두고 항상 새로운 상상력으로 사람들에게 새로운 꿈과 희망을 주는 사람이다. 리더의 꿈에 희망을 걸고 함께 도전하는 모든 구성원들의 용기만 있으면 리더의 상상력을 현실로 만들어 내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실 지키지 못할 헛공약이 어디에 있나. 어느 개그맨이 유행시킨 “안되는 게 어디 있어?”라는 말처럼 처음부터 안 되는 헛공약은 없다. 다만 지레 겁을 먹고 포기하기 때문에 헛공약이 되고 마는 것이다.
흔히 상상력이 부족한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는 일들은, 대부분의 경우 쉽게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사람들은 자신의 지식과 경험에 비추어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될 경우에만 믿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국가는 물론이거니와 자치단체를 이끌어갈 리더로서 신뢰감을 주어야 한다는 것은 기본이다.
그러나 리더가 단순히 신뢰감을 주는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것은, 미래를 생각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보지 않는 것, 평범 저 너머에 있는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무엇인가를 상상하고 꿈꾼다. 그런 상상력에 의해 인류는 진화하고 진보한다.
크거나 작은 프로젝트는 모두 마음속에서 시작된다. 그것들은 지금 단지 머리 속에 들어있는 그림이지만 언젠가는 실현될 것이라는 상상력과 믿음으로 시작된다.
따라서 선거에 출마하는 후보들에게 확실한 답이 나오는 수학적 공약을 요구하거나, 그 실현확실성을 담보한 공약만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것은, 그것이 지닌 일정부분의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별로 반가운 현상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상상력의 제약을 요구하기 보다는, 자유롭고 창의적 공약의 거침없는 제시가 가능토록 하고 그것을 언젠가는 현실로 만들어 갈 수 있다는 신념을 요구하는 것이 더 낫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유사 이래 인류의 발전을 이끌어 온 동력은 바로 ‘상상력’이기 때문이다.
<위 글은 시민일보 4월13일자 오피니언 5면에 게재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이 자치단체의 발전을 위해 과연 옳기만 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솔직히 의문을 갖고 있다.
이런 의문을 갖는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리더의 상상력을 제한하는 족쇄로 작용할 것이란 우려 때문이다.
창조적 상상력의 산물인 새로운 공약은, 그것이 당대에 곧바로 현실화 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어느 누군가의 벤치마킹에 의해, 아니면 강력한 추진력을 가진 또 다른 리더에 의해 언제든 현실화 될 수 있고, 이를 통해 우리는 보다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 때문이다.
매니페스토(정책강령)란, 선언 또는 성명서의 의미인데, 현재는 정당이 내거는 공약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종래의 선거공약과는 달리 ‘사후 검증 가능한 명확한 공약’을 말한다.
라틴어의 ‘손(manus)’과 ‘치다(fendere)’가 합성되어 ‘손으로 느낄 만큼 명확히 하다’는 의미로 파생되어 정치용어가 되었다는 설이 유력한 매니페스토가 정치적 선언의 의미로 사용하게 된 것은 1848년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에서 독일어로 쓰여진 ‘manifest’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현재 세계에서 일반적으로 쓰이고 있는 매니페스토는 ‘이탈리아 공산당 선언’에서 사용된 이탈리아어의 ‘manifesto’라고 한다.
영국에서는 정당에서 공표하는 정책강령을 매니페스토라고 해서 정책의 수치 목표, 실시 기한, 재원, 방법 등 구체적인 정권공약의 의미로 쓰여 왔다.
일본에서도 영국을 모델로 하여 1998년 통일지방선거 때에 처음으로 매니페스토가 선을 보인 이래, 2003년의 공직선거법 개정에 의해서 보궐선거를 제외한 국정선거에서는 정당이 매니페스토를 선거기간 중에 배포할 수 있게 되어 2003년 11월9일 총선에서는 각 당이 매니페스토를 작성하기도 했다.
2005년 토쿄지방의회의원선거에서 민주당이 발표한 ‘토쿄 매니페스토 2005’를 시발로 하여 로칼 매니페스토의 움직임이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있다고 한다.
문제는 그동안 공약(空約)에 지쳐왔던 많은 유권자들 입장에서야 충분히 공감한다고 하더라도, 후보자들에게 그것이 최고의 선(善)인양 요구하는 것이 과연 능사인가 하는 점이다.
구체적 수치와 각종 데이터 등을 필요로 하는 만큼, 가장 신뢰성 있는 데이터에 상시 접근할 수 있는 현직 후보자에게만 특히 유리하다는 문제점과 함께, 리더의 상상력을 지나치게 제한하는 역효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는 비판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람들은 ‘미래는 상상력의 차이가 승패를 가른다’는 말을 의심하지 않는다. 무모하다고 할 정도로 비판받았던 한 갱의 상상력이 쓸모없는 황무지를 세계최고의 도박과 관광의 도시 라스베이거스로 변모시켰고, 동전 한 닢에서 희망을 발견한 한 인간의 거대한 상상력이 엄청난 금액의 선박건조를 수주해 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상상력은 지식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던 아인슈타인의 혜안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진정한 리더는 미래에 초점을 두고 항상 새로운 상상력으로 사람들에게 새로운 꿈과 희망을 주는 사람이다. 리더의 꿈에 희망을 걸고 함께 도전하는 모든 구성원들의 용기만 있으면 리더의 상상력을 현실로 만들어 내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실 지키지 못할 헛공약이 어디에 있나. 어느 개그맨이 유행시킨 “안되는 게 어디 있어?”라는 말처럼 처음부터 안 되는 헛공약은 없다. 다만 지레 겁을 먹고 포기하기 때문에 헛공약이 되고 마는 것이다.
흔히 상상력이 부족한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는 일들은, 대부분의 경우 쉽게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사람들은 자신의 지식과 경험에 비추어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될 경우에만 믿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국가는 물론이거니와 자치단체를 이끌어갈 리더로서 신뢰감을 주어야 한다는 것은 기본이다.
그러나 리더가 단순히 신뢰감을 주는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것은, 미래를 생각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보지 않는 것, 평범 저 너머에 있는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무엇인가를 상상하고 꿈꾼다. 그런 상상력에 의해 인류는 진화하고 진보한다.
크거나 작은 프로젝트는 모두 마음속에서 시작된다. 그것들은 지금 단지 머리 속에 들어있는 그림이지만 언젠가는 실현될 것이라는 상상력과 믿음으로 시작된다.
따라서 선거에 출마하는 후보들에게 확실한 답이 나오는 수학적 공약을 요구하거나, 그 실현확실성을 담보한 공약만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것은, 그것이 지닌 일정부분의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별로 반가운 현상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상상력의 제약을 요구하기 보다는, 자유롭고 창의적 공약의 거침없는 제시가 가능토록 하고 그것을 언젠가는 현실로 만들어 갈 수 있다는 신념을 요구하는 것이 더 낫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유사 이래 인류의 발전을 이끌어 온 동력은 바로 ‘상상력’이기 때문이다.
<위 글은 시민일보 4월13일자 오피니언 5면에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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