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INK:1} 지난 1970년 1월26일.
박정희의 3선 개헌을 저지하지 못한 신민당은 전당대회에서 유진산씨를 새 당수로 선출했다.
이에 따라 그 이듬해인 1971년 4월27일에 실시되는 대통령 선거에 유 총재가 신민당의 대권후보로 나서게 될 것이란 전망이 우세했다.
실제 김영삼이 ‘40대 기수론’을 외치며 대선출마를 선언할 때, 당의 원로와 중진들은 구상유취(口尙乳臭, 입에서 젖비린내 난다)라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을 정도다.
그러나 당내의 ‘젊은 피’ 김대중 이철승이 ‘40대 기수론’에 합류하면서 ‘기수론’은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고 말았다.
특히 당시 박정희 정권은 비교적 상대하기 손쉬운 유진산을 지원하고 있었는데,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9월 21일 마침내 유진산은 신민당 대권후보 경선 경쟁에서 물러나게 된다.
따라서 김영삼이가 신민당 후보로 선출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실제 신민당 대권후보 지명대회 하루 전까지 김영삼이가 신민당 대권후보가 되는 것을 의심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심지어 경향신문은 신민당 대권후보 지명 투표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김영삼 압승’이라는 호외를 찍기까지 했다고 하니, 당시 상황이 어찌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70년 9월29일 신민당 1차 투표에서 총투표수 855표 가운데 김영삼 421표, 김대중 382표, 백지 78표, 무효 82표로 그 누구도 과반수를 얻지 못해 2차 투표에 돌입하게 된다
그러면 어째서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일까?
압도적으로 승리할 줄 알았던 김영삼이가 김대중에게 표를 대거 잠식당한 이유가 무엇일까?
투표 전날 김대중은 후보선출 경선투표에 참가하기 위하여 지방에서 올라와 여관에 머물고 있던 신민당 대의원들을 밤새 찾아다니며 지지해 줄 것을 호소했다고 한다. 느긋하게 승리감에 빠져있던 김영삼과는 달랐다. 김대중의 이런 지극한 정성에 감복한 대의원들이 김대중을 지지하는 바람에 2차 투표를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기적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2차투표에서 김대중은 이철승 마저 설득, 그의 지지를 이끌어 내고 결국 김대중은 458표를 얻어 410표를 얻는데 그친 김영삼을 누르고 마침내 신민당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있었다.
김영삼은 1차 투표에서 획득한 표마저 잃어버린 것이다.
지금 한나라당은 대세론에 의해 자만심에 빠져들고 있다.
마치 한나라당이 차기 정권창출을 보장이라도 받은 듯이 들떠 있다. 그래서 한나라당은 ‘빅3’ 가운데 한사람인 손학규 전 경기지사가 ‘경선불참’을 강력하게 시사해도 개의치 않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심지어 이명박 전 시장은 그를 향해 야유를 보내기도 했다.
실제 이 전 시장은 지난 5일 손 전 지사의 탈당 가능성에 대해 “나간다는 사람들은 결국 나가지 않는다. (손 전 지사는) 안에 남아도 시베리아에 있는 것이지만, (당 밖으로) 나가도 추운 데 나가는 것”이라며 노골적으로 조롱했다.
김영삼이 ‘40대 기수론’을 외치며 대선출마를 선언할 때, 유진산을 지원하는 당의 원로와 중진들이 구상유취(口尙乳臭, 입에서 젖비린내 난다)라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인 것과 너무나 흡사하다.
하지만 유진산은 패했다.
박정희 정권은 비교적 상대하기 손쉬운 그가 야당 대권후보로 선출되는 것을 원했고, 은근히 그를 지지한 사실이 발각됐기 때문이다.
현재 범여권에서는 한나라당에서 누가 후보로 나오는 것을 가장 바라고 있을까?
왜 각종 언론에서 ‘노명박’이라는 소리가 자주 등장하는 것일까?
만일 이명박이 낙마하면 자동케이스로 박근혜가 대권주자가 되는 것일까?
유진산이 낙마하자 당연히 김영삼이가 신민당 후보가 될 것으로 예상했으나, 그 결과가 뒤집어졌던 것처럼 손학규나 원희룡이가 한나라당 후보로 선출되는 기적이 일어날 가능성은 전혀 없는 것일까?
70년대 신민당 대권주자 선출 과정을 뒤돌아보면서 2007년 한나라당 대선주자 선출에서 얻을 역사적 교훈은 없는 것일까?
과연 한나라당에서 신민당의 70년대 기적이 나타날 수는 있는 것일까?
박정희의 3선 개헌을 저지하지 못한 신민당은 전당대회에서 유진산씨를 새 당수로 선출했다.
이에 따라 그 이듬해인 1971년 4월27일에 실시되는 대통령 선거에 유 총재가 신민당의 대권후보로 나서게 될 것이란 전망이 우세했다.
실제 김영삼이 ‘40대 기수론’을 외치며 대선출마를 선언할 때, 당의 원로와 중진들은 구상유취(口尙乳臭, 입에서 젖비린내 난다)라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을 정도다.
그러나 당내의 ‘젊은 피’ 김대중 이철승이 ‘40대 기수론’에 합류하면서 ‘기수론’은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고 말았다.
특히 당시 박정희 정권은 비교적 상대하기 손쉬운 유진산을 지원하고 있었는데,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9월 21일 마침내 유진산은 신민당 대권후보 경선 경쟁에서 물러나게 된다.
따라서 김영삼이가 신민당 후보로 선출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실제 신민당 대권후보 지명대회 하루 전까지 김영삼이가 신민당 대권후보가 되는 것을 의심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심지어 경향신문은 신민당 대권후보 지명 투표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김영삼 압승’이라는 호외를 찍기까지 했다고 하니, 당시 상황이 어찌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70년 9월29일 신민당 1차 투표에서 총투표수 855표 가운데 김영삼 421표, 김대중 382표, 백지 78표, 무효 82표로 그 누구도 과반수를 얻지 못해 2차 투표에 돌입하게 된다
그러면 어째서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일까?
압도적으로 승리할 줄 알았던 김영삼이가 김대중에게 표를 대거 잠식당한 이유가 무엇일까?
투표 전날 김대중은 후보선출 경선투표에 참가하기 위하여 지방에서 올라와 여관에 머물고 있던 신민당 대의원들을 밤새 찾아다니며 지지해 줄 것을 호소했다고 한다. 느긋하게 승리감에 빠져있던 김영삼과는 달랐다. 김대중의 이런 지극한 정성에 감복한 대의원들이 김대중을 지지하는 바람에 2차 투표를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기적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2차투표에서 김대중은 이철승 마저 설득, 그의 지지를 이끌어 내고 결국 김대중은 458표를 얻어 410표를 얻는데 그친 김영삼을 누르고 마침내 신민당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있었다.
김영삼은 1차 투표에서 획득한 표마저 잃어버린 것이다.
지금 한나라당은 대세론에 의해 자만심에 빠져들고 있다.
마치 한나라당이 차기 정권창출을 보장이라도 받은 듯이 들떠 있다. 그래서 한나라당은 ‘빅3’ 가운데 한사람인 손학규 전 경기지사가 ‘경선불참’을 강력하게 시사해도 개의치 않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심지어 이명박 전 시장은 그를 향해 야유를 보내기도 했다.
실제 이 전 시장은 지난 5일 손 전 지사의 탈당 가능성에 대해 “나간다는 사람들은 결국 나가지 않는다. (손 전 지사는) 안에 남아도 시베리아에 있는 것이지만, (당 밖으로) 나가도 추운 데 나가는 것”이라며 노골적으로 조롱했다.
김영삼이 ‘40대 기수론’을 외치며 대선출마를 선언할 때, 유진산을 지원하는 당의 원로와 중진들이 구상유취(口尙乳臭, 입에서 젖비린내 난다)라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인 것과 너무나 흡사하다.
하지만 유진산은 패했다.
박정희 정권은 비교적 상대하기 손쉬운 그가 야당 대권후보로 선출되는 것을 원했고, 은근히 그를 지지한 사실이 발각됐기 때문이다.
현재 범여권에서는 한나라당에서 누가 후보로 나오는 것을 가장 바라고 있을까?
왜 각종 언론에서 ‘노명박’이라는 소리가 자주 등장하는 것일까?
만일 이명박이 낙마하면 자동케이스로 박근혜가 대권주자가 되는 것일까?
유진산이 낙마하자 당연히 김영삼이가 신민당 후보가 될 것으로 예상했으나, 그 결과가 뒤집어졌던 것처럼 손학규나 원희룡이가 한나라당 후보로 선출되는 기적이 일어날 가능성은 전혀 없는 것일까?
70년대 신민당 대권주자 선출 과정을 뒤돌아보면서 2007년 한나라당 대선주자 선출에서 얻을 역사적 교훈은 없는 것일까?
과연 한나라당에서 신민당의 70년대 기적이 나타날 수는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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