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일간지 기자의 ‘기자수첩’을 읽다 씁쓸한 기분으로 신문을 덮었다.
경제 관련 국책연구원인 A박사에게 취재차 전화를 걸었더니, “지난달 국회 토론회에 참석하려 했지만, 정부정책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자리라는 이유로 연구원장이 참석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하소연하더라는 것이 정 기자 글의 요지였다. ‘세월’은 변해도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 글이었다.
2004년 17대 총선 직전의 일이 새삼 떠올랐다. 김해 출신 대통령이 배출되면서, 김해지역의 인사들의 열린우리당 입당행렬이 이어지던 때였다. 나도 여러 선배들로부터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이름만 말하면 누구나 알 수 있는(언론에서 노 후원자라고 보도된) 김해의 기업인과 유력인사가 ‘윗분의 뜻’이라며 “당을 옮기면 전폭적으로 지원하겠다. 공천은 경선 없이 준다고 했다”고 권유했다. 난 그분들에게 “부족한 나를 인재라고 보고 몇 번이나 설득하여 경남도의회 3선까지 하고 최연소 부의장을 할 수 있도록 제도 정치권에 입문시켜 주었던 한나라당의 전 사무총장이 구속되어 있다. 내가 탈당하면 그분이 구치소에서 화병이 나지 않겠는가? 사람의 탈을 쓰고는 못할 일이다”라고 제의를 거절하였다.
여권과 가까운 많은 사람의 권유를 물리치자 대통령의 ‘최측근’에게서도 전화가 왔다. 난 선거 이후에 뵙자고 정중히 거절하고 한나라당 공천을 신청하고 선거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십 수 차례 많은 사람들의 강권을 물리치자 김해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제복 공무원’ 중 정보계통의 사람들이 나하고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을 위하는 척 “몸조심하라”는 ‘충고’를 하며 나와의 거리를 벌려놓기 시작했다.
급기야 나와 함께 지역에서 생활정치 운동하던 사람들이 검찰에 불려가 4시간 이상 조사를 받았다. 그 내용이 “김정권을 어떻게 알게 됐느냐? 얼마나 도와주었느냐?” 식이었고, “다음에는 누구를 조사 하겠다’고 예고까지 하더라는 것이었다.
지인이 조사한 이유를 묻자 담당검사의 답변은 “진정서가 들어왔기 때문에”였다. 그런데 진정인의 주소와 이름을 파악해 보니 그 주소지는 허허벌판이었고, 그 이름은 인근지역을 탐문해 보았지만 어디에도 없는 가상의 인물이었다.
이같은 손발자르기와 탄핵역풍으로 결국 총선에서 고배를 마신 나는, 1년 후인 2005년 4월30일 재선거를 통해 국회의원이 되었다.
17대 총선 당시 겪은 고초는 정치공작으로 정치권에 진출하려는 사람과 그 세력들이 권력을 믿고 정치검사를 활용한 사건이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권력을 등에 업고 횡포를 부리는 사람은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다는 사실이다.
대통령선거 185일 전이다. 정책도 비전도 제시하지 않고 한나라당 유력 후보자를 무차별 공격하는 모습에서 새삼 정치공작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경제 관련 국책연구원인 A박사에게 취재차 전화를 걸었더니, “지난달 국회 토론회에 참석하려 했지만, 정부정책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자리라는 이유로 연구원장이 참석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하소연하더라는 것이 정 기자 글의 요지였다. ‘세월’은 변해도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 글이었다.
2004년 17대 총선 직전의 일이 새삼 떠올랐다. 김해 출신 대통령이 배출되면서, 김해지역의 인사들의 열린우리당 입당행렬이 이어지던 때였다. 나도 여러 선배들로부터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이름만 말하면 누구나 알 수 있는(언론에서 노 후원자라고 보도된) 김해의 기업인과 유력인사가 ‘윗분의 뜻’이라며 “당을 옮기면 전폭적으로 지원하겠다. 공천은 경선 없이 준다고 했다”고 권유했다. 난 그분들에게 “부족한 나를 인재라고 보고 몇 번이나 설득하여 경남도의회 3선까지 하고 최연소 부의장을 할 수 있도록 제도 정치권에 입문시켜 주었던 한나라당의 전 사무총장이 구속되어 있다. 내가 탈당하면 그분이 구치소에서 화병이 나지 않겠는가? 사람의 탈을 쓰고는 못할 일이다”라고 제의를 거절하였다.
여권과 가까운 많은 사람의 권유를 물리치자 대통령의 ‘최측근’에게서도 전화가 왔다. 난 선거 이후에 뵙자고 정중히 거절하고 한나라당 공천을 신청하고 선거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십 수 차례 많은 사람들의 강권을 물리치자 김해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제복 공무원’ 중 정보계통의 사람들이 나하고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을 위하는 척 “몸조심하라”는 ‘충고’를 하며 나와의 거리를 벌려놓기 시작했다.
급기야 나와 함께 지역에서 생활정치 운동하던 사람들이 검찰에 불려가 4시간 이상 조사를 받았다. 그 내용이 “김정권을 어떻게 알게 됐느냐? 얼마나 도와주었느냐?” 식이었고, “다음에는 누구를 조사 하겠다’고 예고까지 하더라는 것이었다.
지인이 조사한 이유를 묻자 담당검사의 답변은 “진정서가 들어왔기 때문에”였다. 그런데 진정인의 주소와 이름을 파악해 보니 그 주소지는 허허벌판이었고, 그 이름은 인근지역을 탐문해 보았지만 어디에도 없는 가상의 인물이었다.
이같은 손발자르기와 탄핵역풍으로 결국 총선에서 고배를 마신 나는, 1년 후인 2005년 4월30일 재선거를 통해 국회의원이 되었다.
17대 총선 당시 겪은 고초는 정치공작으로 정치권에 진출하려는 사람과 그 세력들이 권력을 믿고 정치검사를 활용한 사건이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권력을 등에 업고 횡포를 부리는 사람은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다는 사실이다.
대통령선거 185일 전이다. 정책도 비전도 제시하지 않고 한나라당 유력 후보자를 무차별 공격하는 모습에서 새삼 정치공작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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