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부활(4)

    기고 / 시민일보 / 2007-07-18 19:4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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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인봉譯(변호사)
    일하고자 하는 노조원을 데모 대가 피켓으로 저지하고자 하여 경찰대와 충돌하여, 사망자·부상자가를 내는 소동이 몇 번이나 일어났다. 노조의 가족이 파업 파, 반 파업 파로 갈라져 골육 상잔을 하는 비극도 발생했다.

    스카길로서는 파업 불참자가 3분의 1 가까이 나온 것은 예상 외의 일이었다. 1974년에 탄광노조가 정부를 깬 시절과 에너지 사정이 전혀 달라졌다는 것도 오산이었다. 1974년 당시 영국은 에너지의 75%를 석탄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탄광노조의 전면 파업으로 화력발전소가 조업 정지에 몰려, 일반 가정이 촛불 생활을 강요당했을 뿐만 아니라, 산업도 주 3일밖에 가동할 수 없는 상태에 몰렸다. “누가 영국을 지배하는가?” 라는 히스 수상의 외침도 결국 “탄광노조가 지배하는” 경과로 끝나 히스 퇴진이 되었다. 스카길은 당시 부위원장으로 탄광노조 파업을 지도하여 크게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대처 앞에 스카길의 10년 전의 꿈은 무너져갔다. 석탄의 에너지 소비에 차지하는 비율은 35%로 떨어져 있었으며, 1985년 겨울에는 화력발전소를 가동할 수 있을 만큼의 석탄이 비축되어 있었다. 게다가 경제적으로 채산이 맞지 않는 탄광을 국민의 세금으로 보조하는 것이, 경제 효율로 보아 얼마나 낭비인가 라는 대처의 호소가 탄광노조 내부에도 침투되어 있었다.

    1984년 가을에 대처는 노동조합법을 개정하고, 파업 권 확립 투표를 의무화하여 투표로 승인되지 않은 파업을 위법으로 인정하여 파업 권 투표 없이 실시된 탄광노조 파업 참가 조합원에게 동요를 가져왔다.

    겨울의 고비를 극복한 정부와 석탄공사는 1985년 3월에 들어서서 마침내 이겼다. 파업에서 이탈한 노조원이 늘어나서 50%가 넘어선 시점에서 탄광노조 전국 대표자회의가 투표로 “전국 조합원은 무조건 파업을 포기하고 3월5일부터 직장에 복귀한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노조 측의 전면 패배였다. 석탄 비축과 에너지 사정의 완화를 배경으로 한 대처의 작전과 신념의 승리였다.

    대처가 제1기에서 남긴 일로 국영기업의 민영화가 있었다. 정권 담당 이전부터 국영기업의 비효율성을 비난하고 민영화를 정책의 기둥의 하나로 삼은 그녀는 민영화야말로 경쟁 원리의 도입에 의해 기업이 활성화된다고 보아, 사회주의 사상에 물들은 노동당의 국영화 정책이 기업이나 사람이나 타락시켰다고 단정했다. 대처로서는 사회주의는 적이고 국영기업은 사회주의를 체현한 것이었다.

    그러나 조합 대책과 마찬가지로 민영화도 역시 함부로 돌진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신념을 강경하게 관철하는 것의 어리석음을 깨달았을 때, 조건이 갖춰질 때까지 기다리는 현실주의도 그녀는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없었다면 금세기의 수상 재임 최고 기록은 달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즉각적인 민영화가 어려웠던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로 거대한 채무를 안고 있던 국영기업을 그대로 시장에 팔아봤자 스크랩과 마찬가지인 시장 가치밖에 없었다. 시장에 주식을 판매할 경우 파산 직전인 기업으로는 사는 사람이 없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둘째로 국민의 세금을 쏟아 부어 채산성이 있는 기업으로 만든 후, 금방 민영화하는 것은 민영화된 기업의 주식을 가지지 않은 일반 국민으로서는 불공평하지 않는가 라는 의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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