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린 파월과 네오콘

    기고 / 시민일보 / 2008-10-22 19:4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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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돈(중앙대학교 법학과 교수)
    조지 W. 부시 1기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지낸 콜린 파월이 오바마를 지지해서 파문이 일었다. 파월이 오바마를 지지할 것이라는 예측은 지난봄부터 심심치 않게 있었다. 파월은 자기가 매케인을 지지하지 않는 이유를 몇 가지 들었다. 하지만, 공화당원인 그가 더 이상 공화당을 지지하지 않는 이유는 더 깊은 데 있다.

    콜린 파월이 단순한 육군 장교를 넘어서 정치 지도자로 부각하게 된 계기는 닉슨 대통령 시절에 백악관에서 펠로우로 일한 다음부터이다. 순조롭게 진급을 거듭한 파월은 레이건 행정부에서 캐스퍼 와인버거 국방장관의 보좌역을 지냈다. 1987년에 와인버거 장관이 사임하자 레이건 대통령은 안보보좌관이던 칼루치를 국방장관에 임명하고, 칼루치의 후임에 현역 중장인 파월을 임명했다. 파월이 임명되었을 때에는 레이건의 임기 말이었기 때문에, 안보보좌관으로서의 파월은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레이건 행정부 시절부터 공화당 보수파는 조지 H. W. 부시 부통령, 제임스 베이커 재무장관, 그리고 콜린 파월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조지 H. W. 부시 부통령이 1989년에 대통령에 취임하자 파월은 대장으로 승진해서 합참의장이 되었다. 자마이카 출신의 흑인이 각료나 합참의장이 된 것은 미국 역사상 처음이었다. 파월은 52세란 젊은 나이로 합참의장이 된 기록도 함께 세웠다. 파월은 웨스트포인트 출신도 아니었다. 파월은 뉴욕시립대학이란 평범한 대학에서 평균 C학점으로 졸업한 후 ROTC를 거쳐 장교가 된 보통 경력을 갖고 있을 뿐이었다.

    파월은 합참의장으로서 걸프 전쟁을 치렀다. 당시 국방장관은 딕 체니였고, 국방차관은 사업가 출신의 도널드 애트우드였고, 차관보는 전략가 스타일인 폴 울포비츠였다. 사담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점령함으로써 시작된 위기에 대해 부시 행정부는 강경하게 대응했다. 국무장관 제임스 베이커는 유엔에서 결의문을 얻어내고 동맹국들을 설득해서 대규모 다국적군을 결성했고, 많은 국가로부터 전비(戰費)를 조성해서 미국민의 세금을 쓰지 않고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다. 미국은 1980년대에 비축한 첨단 군사장비를 십분 이용해서 세계 유일 초강대국의 면모를 발휘했다.

    콜린 파월도 나중에 인정했듯이, 체니 국방장관은 합참을 자주 들러서 작전의 상세한 부분을 직접 챙겼다. 쿠웨이트 위기가 터지자 국방부의 일상적 사무는 애트우드 차관이 도맡아 처리했고, 체니 장관은 전쟁 지휘에, 그리고 울포비치 차관은 장기적 전략 문제에 집중했다. 당시 큰 문제는 다국적군이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후세인을 축출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체니 장관과 콜린 파월은 다국적군이 후세인을 축출하면 미국이 이라크의 전후(戰後) 처리를 도맡아야 하는 곤경에 빠진다고 생각했다. 조지 H. W. 부시 대통령과 이들은 후세인이 재기하기 어려울 것이며, 이라크에서 내부변화가 생길 것으로 기대했다.

    심지어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의 시아파(派)와 쿠르드족(族)이 반란을 일으키면 미국이 지원할 것으로 해석되는 메시지를 발표했다. 부시 대통령의 발표가 있자 후세인의 수니파(派)의 학정(虐政)에 시달려 온 남부의 시아파와 북부의 쿠르드족은 반란 봉기를 일으켰다. 그러자 후세인은 친위부대인 공화국 수비대를 동원해서 시아파와 쿠르드 족을 대량으로 학살했다. 북부 산간지역에 사는 쿠르드족에게는 독가스를 살포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시아파가 반란을 일으킨 곳에는 미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미 육군부대는 후세인의 친위부대가 시아파 민간인을 대량 학살하는 모습을 보고만 있어야 했다. 참혹한 학살현장을 보다 못한 현장 지휘관들은 후세인 친위대를 진압하기 위한 공격 허가를 요청했지만 합참은 관여하지 말라고 했다. 후세인 친위대에 속한 무장 헬기가 시아파 민간인들을 학살할 때에 바로 그 위에는 미군 F-15 기(機)가 초계비행을 하고 있었다. 조종사는 헬기 격추를 위한 허가를 긴급히 요청했지만 합참은 간여하지 말라고 했다.

    그 장소에 있었던 미군 장교들은 그때가 자신들의 군복무 중 가장 암흑과 같은 시기였다고 울분을 터뜨렸다. 어느 미군 장교는 차라리 후세인의 군대가 자기 부대를 공격해 주기를 고대했다고 술회했다. 후세인의 군대가 미군을 공격하면 상부에 허가를 요청함이 없이 자위권을 발동해서 후세인의 군대를 섬멸하고 민간인을 구할 수 있었으나, 후세인의 군대는 미군을 공격하지 않았다. 당시 영관 및 위관급 지휘관들은 한결 같이 자신들이 부끄러웠다고 말하면서 상부를 원망했다. 그 상부에 바로 파월이 있었다.

    이런 사정을 보고 받은 국방차관 폴 울포비츠는 미군 지휘부에 대해 분노했다. 학자이며, 더구나 인종 박해를 받았던 유태인인 울포비치는 후세인의 인종청소를 중지시킬 수 있었던 기회를 놓친 합참을 이해할 수 없었다. 1992년 선거에서 부시 대통령이 클린턴에게 패배하자 울포비츠는 존스 홉킨스 대학의 학장을 지내면서 다음에 들어설 공화당 정부의 정책을 구상했다. 그는 걸프 전쟁이 미완(未完)으로 끝난 것을 유감으로 생각했다. 그는 미국이 무력으로 도덕적 목적을 달성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자신의 생각을 더욱 확고히 했다. 울포비츠는 몇 차례에 걸쳐서 걸프 전쟁 당시 시아파 민간인 학살을 방관토록 한 책임자들을 비판했다. 울포비치가 지목한 책임자는 다름 아닌 콜린 파월이었다. 코넬 대학을 나오고 시카고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명석한 유태인 폴 울포비치에게 콜린 파월은 지성과 도덕과 상상력이 부족한 운 좋은 군인에 불과했다.

    클린턴의 임기가 끝나갈 무렵인 1997년 6월, 울포비츠는 도널드 럼스펠드, 딕 체니, 빌 크리스톨 등과 함께 흔히 ‘네오콘 선언’이라고 부르는 문서를 발표했다. 2001년 초,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출범하자 럼스펠드는 국방장관이 되었고, 울포비츠는 국방차관이 되었으며, 콜린 파월은 국무장관이 되었다. 학자 출신인 콘돌리사 라이스가 안보보좌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9-11 테러가 발생했고, 네오콘 그룹은 이 기회에 ‘악(惡)’을 소탕하려 했다.

    부시 행정부에서 대외정책은 딕 체니 부통령이 주도했다. 체니 부통령의 비서실장이던 또 다른 네오콘 멤버인 스쿠터 리비는 대학 재학시 울포비츠에게 정치학을 배웠다. 네오콘 그룹은 대외정책에서 주도권을 장악했고, 국무장관 파월은 겉돌았다. 유태계가 주축이 된 네오콘 그룹은 시아파 민간인 대학살을 방임한 파월을 도덕적으로 무감각한 사람으로 취급했다. 파월이 이라크 문제에 대해 제대로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이유는 바로 시아파 학살을 방관해서 후세인 정권을 연장시켰다는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국무장관으로서 파월은 유엔 안보이사회에 출석해서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갖고 있다는 증거가 있다고 브리핑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정보였음이 얼마후에 드러났다. 2005년 1월 말, 파월은 국무장관직을 사임했다.

    온화한 이미지를 갖고 있는 파월은 대중적 인기가 좋았다. 1996년 대선을 앞두고 공화당은 후보난(難)을 겪고 있었다. 그 때 많은 여론조사는 콜린 파월이 클린턴 대통령을 이길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파월은 대선 후보 출마를 하지 않았다. 당내 경선이 만만치 않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공화당내에서 온건파에 속하는 파월은 당내 ‘이단자’인 매케인과 돈독한 사이였다.

    금년 여름 매케인이 파월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할 것이라는 소문도 있었지만 그것은 당초부터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매케인은 공화당내 보수파의 지지를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파월이 오바마를 지지할 것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결국 지난 10월 19일, 방송 인터뷰에서 파월은 오바마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파월을 돌려놓고 이라크 전쟁을 밀고 나갔던 네오콘은 결국 전쟁을 망치고 말았고, 이제 공화당은 정권을 내어놓을 처지에 놓였다. 클린턴 행정부에서 중부군 사령관을 지내면서 이라크에 대한 제한적 군사활동을 지휘한 안서니 지니 대장(예비역)은 이라크 침공을 반대하면서, 울포비츠가 이상(理想)만 높았고 복잡한 이라크 사정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지도 못했다고 지적했다. 이제 콜린 파월도, 폴 울포비츠도 흘러간 인물이 되고 있다. 이렇게 해서 한 시대가 막(幕)을 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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