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 정권의 이라크에서의 실패가 공화당과 보수정치 자체에 막대한 타격을 주었음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이라크에서의 실패에 대해 가장 큰 책임을 질 사람은 물론 부시 대통령이다. 부시 대통령을 잘못된 길로 이끈 그룹은 딕 체니 부통령, 럼스펠드 전 국방장관, 리차드 펄 전 국방정책위원장, 폴 울포비츠 전 국방차관 등 네오콘 인맥이다.
네오콘은 철학으로서 이라크 전쟁을 합리화시켰다. 반면 콜린 파월 당시 국무장관은 이라크 침공을 합리화시키는데 들러리를 섰다. 콜린 파월이 그렇게 무력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은 10월22일자 칼럼 ‘콜린 파월과 네오콘’에 나타나 있다. 이라크 침공을 기정사실로 하더라도 미국의 이라크 침공작전은 미군 역사상 가장 허술하게 기획된 작전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작전기획을 잘못한 책임은 당시 중부군 사령관인 토미 프랑크스 중장이 가장 크다. 부시 정권은 바그다드를 점거한 후 통치에 대해서도 확실한 청사진을 갖고 있지 못했다. 이라크에 주둔한 현지 지휘관들은 당시 군정장관 폴 브레머가 상황을 엉망으로 만든 데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지적한다.
이라크 침공은 ‘9-11 테러’에 대한 미국의 대응이었다. 만일에 사담 후세인이 핵무기를 갖고 있다면 이제는 워싱턴에서 핵 테러가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이라크 침공을 초래한 것이다. 그렇다면 9-11 테러를 막지 못하고, 후세인이 대량살상무기를 갖고 있다고 부시 대통령에게 보고한 CIA(중앙정보국)의 책임이야말로 가장 크다고 해야 한다. 9-11 테러와 이라크 침공 당시 CIA 국장은 조지 테닛(George Tenet)이었다.
역사상 가장 무능한 CIA 국장으로 기록될 조지 테닛의 실패를 다루기에 앞서 어떻게 조지 테닛 같은 사람이 CIA 국장이 될 수 있었나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1953년생인 조지 테닛은 조지타운 대학을 나오고 콜럼비아 대학에서 외교학 석사를 했다. 그는 나이 30이 다되어 존 하인즈 상원의원(펜실베이니아 주 출신 공화당 의원. 하인즈 식품회사 상속자이며, 2004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존 케리의 부인인 테레사의 첫 남편이었다. 하인즈 의원은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의 보좌관을 지냈고, 1985년부터 1993년까지 상원 정보위원회의 스태프를 지냈다.
그러던 테닛에게도 햇볕이 들기 시작했다. 1992년 대선에서 대통령에 당선된 클린턴의 정권인수위원회에서 테닛은 정보분과 일을 맡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클린턴 행정부와 인연을 맺게 됐다. 클린턴 대통령은 테닛을 국가안보위원회 정보분과위원장으로 임명했고, 1995년에 CIA 부국장에 임명했다. 첩보 분야와는 전혀 관계가 없던 테닛이 별안간 CIA 부국장이 된 것이다.
1996년 12월, 당시 CIA 국장이던 존 도이치가 별안간 사임했다. 그러자 클린턴은 테닛을 CIA 국장에 임명했다. 테닛이 이렇게 고속승진을 하게 된 것은 사람을 사귀는 것을 중시하는 그의 ‘마당발’ 같은 성격 때문이었다. 그는 특히 영향력이 큰 사람들과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또 그런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했다.
테닛은 클린턴의 두 번째 임기 중 CIA 국장을 지냈다. 테닛은 2001년 초에 새 정부가 들어서면 CIA 국장직을 그만 둘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또한 조지 W. 부시의 인수팀에서도 테닛이 당연히 경질될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은 테닛에게 CIA 국장에 머물러 줄 것을 요청했다. 부시의 이러한 결정에 대해 측근들은 놀랐다. 테닛과 부시와의 관계에 있어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은 아버지 부시였다. 1999년에 테닛은 버지니아 랭리에 있는 CIA 본부건물을 ‘조지 부시 정보센터’라고 명명하고 아버지 부시를 초청해서 성대한 파티를 열었다. (아버지 부시는 상원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후 닉슨 대통령에 의해 CIA 국장에 임명되어 잠시 CIA 국장을 지냈다.) 테닛의 유임은 아버지 부시 덕분이라고 보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2001년 9월11일, 9-11 테러가 발생했다. 전문가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CIA가 무엇을 했느냐고 물었다. 당연히 많은 사람들은 무려 5년 동안 CIA 국장 자리에 앉아 있는 테닛을 지목했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은 테닛을 경질하지 않았다. 아마도 큰일을 수습하는 것이 급할뿐더러, 그런 위기에 CIA 국장을 교체하는 것이 현명치 않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테닛을 경질하지 않은 것은 부시의 최대의 실수 중의 하나로 드러나고 말았다.
냉전(冷戰) 종식 후에 대통령이 된 클린턴은 ‘평화시대의 대통령’이었다. 클린턴 행정부 8년은 군(軍), CIA, 그리고 FBI에 있어 암흑기나 다름없었다. 병역(兵役)이 사라진 70년대 이후 세대인 백악관의 젊은 스태프들은 군 고위장성들을 존중하지 않았다. 병역을 기피한 클린턴 대통령은 군부대 방문을 매우 싫어했다.
취임 초에 클린턴은 제임스 울시를 CIA 국장으로 임명했다. 울시는 전략무기 제한회담 등 군축 문제에 있어 대소(對蘇) 강경입장을 취했던 ‘민주당원 네오콘’이었다. 클린턴이 울시를 CIA 국장에 임명한 것은 민주당내 보수파에 대한 배려였다고 한다. 울시 국장은 재임 중 클린턴 대통령을 단 한번 독대(獨對)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클린턴 대통령을 독대한 것은 1994년에 작은 경비행기가 백악관 앞뜰에 불시착한 사고가 난 후였다. 좌절한 울시는 1995년 1월에 사임했다.
울시의 후임으로 클린턴은 국방차관이던 존 도이치를 임명했다. 존 도이치는 MIT의 화학 교수로서, 정부의 자문역을 맡아 왔었다. 국방에도 문외한(門外漢)이고 첩보에도 문외한인 도이치는 CIA 국장직 제의에 당황했었다고 전해진다. CIA 국장으로서 도이치가 남긴 유일한 업적은 흑인, 여성 등을 CIA 직원으로 많이 고용한 것이었다. CIA를 이끌어 가는 데 한계를 느꼈을 도이치는 1996년 12월 사표를 제출하고 MIT로 돌아갔다. 그 후임으로 클린턴은 부국장이던 조지 테닛을 임명했다. 이처럼 클린턴은 CIA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9-11 테러가 발생하자 조지 테닛은 CIA가 알 케이다의 조직에 침투했지만 핵심에는 근접하지 못해서 9-11을 막지 못했다고 말했다. 9-11 사태 후 네오콘은 그들의 입장을 강화할 수 있는 기회를 포착했다. 더글라스 페이스 국방정책위원장, 폴 울포비츠 국방차관 등 네오콘은 테닛을 좋아하지 않았다. 좋은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한 우수한 인재들인 네오콘이 볼 때 테닛은 그저 정치수완이 좋아서 출세한 ‘건달’에 불과했다. 한편, ‘권력의 추(錘)’가 네오콘으로 기운 것을 모를 리가 없는 테닛은 네오콘을 즐겁게 해야만 했다.
2002년 12월12일, 테닛은 백악관에서 부시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CIA는 사담 후세인이 대량살상무기(WMD)을 갖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를 갖고 있다면서, 그것은 ‘슬램덩크(slam dunk)’ 케이스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이 대화는 워싱턴포스트의 밥 우드워드(Bob Woodward)가 쓴 책 ‘공격 계획(Plan of Attack)’에 의해 세상에 알려 졌다. 2003년 3월 20일, 미군과 영국군은 이라크를 공격했고, 미영(美英) 지상군은 대량살상무기를 샅샅이 찾았으나 결국 발견하지 못했다.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갖고 있다던 테닛의 주장이 틀렸던 것이다. 2004년 6월, 테닛은 부시 대통령에게 사표를 제출했고, 부시는 “테닛이 미국을 위해 탁월하게 봉사했다”면서 사표를 수리했다.
2007년 4월, 테닛의 회고록 ‘폭풍의 한 복판에서(At the Center of the Storm)’가 출간됐다. 테닛은 출판사로부터 선(先)인세 400만 달러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책은 많은 물의를 빚었다. 책에 대한 평가는 절대적으로 좋지 않았다. 신문에 실린 서평은 한결같이 이 책이 “거짓말이고 구차한 변명이며, 위선”이라고 혹평했다. 워싱턴 포스트의 찰스 크라우태머는 “테닛이 마치 자기가 희생양인 것처럼 가장했다”고 비난했다.
테닛은 이 책에서 이라크 침공에 대해 정부 고위급에서 진지한 토론이 없었다고 했으며, 또한 딕 체니 부통령이 독선적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국장정책위원장이던 더글라스 페이스도 비난했다. 그는 특히 2002년 12월에 후세인이 대량살상무기를 갖고 있음은 ‘슬램덩크 케이스’라고 말한 것은 단지 이론적으로 그럴 수 있다는 것일 뿐이라고 변명했다.
테닛이 CIA 국장을 지낼 때 부국장을 지낸 존 맥러핀은 2001년 7월10일에 CIA는 알 케이다의 미(美) 본토 테러 계획이 확정적이라고 판단했다고 폭로해서 테닛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밥 우드워드는 워싱턴 포스트에 기고한 서평에서 테닛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우드워드는 몇 가지 다른 소스를 통해서 보더라도 테닛이 ‘슬램 덩크’라는 표현을 써가면서 부시를 설득했음이 분명하다고 반박했다. 우드워드는 CIA 간부들이 2001년 7월10일에 임박한 테러 위협에 대해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해야 한다고 건의했지만 테닛이 이를 묵살했다고 폭로했다. 우드워드는 이것은 테닛의 ‘임무 포기’라고 신랄하게 비난했다.
책이 나온 후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왜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대해, 테닛은 “대통령은 조치를 취하는 공무원이 아니다”라는 괴상한 답변을 해서 보는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테닛은 그 사실을 당시 안보보좌관이던 콘돌리사 라이스에게 알렸으며, 라이스가 제대로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다고 책에서 언급했다. 이에 대해 라이스 국무장관은 정확한 답변을 피하면서 “내가 언젠가 책을 쓸 기회가 있으면 그 때 사실을 말 하겠다”고 했다.
2007년 8월, CIA 감사관실은 2005년 6월에 작성한 후 기밀로 분류해 온 ‘9-11 자체 보고서’를 공개했다. 보고서는 조지 테닛 전(前) 국장이 전적으로 무능했으며, 9-11 테러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결론내렸다. 보고서는 9-11 테러를 막을 수 있었던 단일한 기회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CIA는 알 케이다의 테러 위협에 대해 대처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테닛은 CIA로부터 자기가 7년간이나 국장으로 있었던 바로 그 CIA로부터 심판을 받은 것이다.
이에 대해 테닛은 자기가 테러에 대비한 대책을 수립했다면서 이 보고서가 잘못됐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상당수의 전직 CIA 요원들은 감사원실의 보고서가 정확하다고 지적했다. 한 전직 요원은 “테닛 국장이 외국 지도자들과 어울리느냐고 너무 바빠서 정보조직을 운영해야 하는 본연의 임무를 망각했다”고 직설적으로 테닛을 비난했다. 또 다른 전직 요원은 “1996년부터 오사마 빈 라덴이 야기하는 위험과 이에 대한 미국 정보기관의 문제점이 테닛의 데스크에 올라 있었지만 그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조지 테닛의 행각(行脚)은 많은 교훈을 준다. 정보기관의 장(長)을 정치적 고려로 임명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 수 있나를 잘 보여준다. 테닛은 알 케이다 테러의 위험은 무시했지만, 이라크의 위험은 과장해서 미국민을 두 번 기만했다. 정치적 배경 외에 자신의 철학이 없는 그는 정치적일 수밖에 없었다. 알 케이다 테러 경고를 무시한 2001년 7월에도, 후세인의 대량살상무기를 과장해서 보고한 2002년 12월에도 그는 정치적이었다. 그것이 부시 행정부와 미국, 그리고 자신을 파멸로 이끌었다. 현재 우리나라 정부의 안보 경제 등 각 분야에서 요직을 맡고 있는 사람들이 그런 자리를 차지하게 된 동기가 대개 ‘정치적’이라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테닛의 실패는 우리에게도 큰 교훈을 준다고 생각된다.
*월간조선 2008년 11월호에는 한국어로 번역 출판될 예정인 테닛의 회고록의 요지가 게재되어 있다. 사정을 잘 알지 못하는 일반 독자들이 이 책만 보게 되면 허위사실을 진실인 것처럼 알게 될 위험성이 있다. 번역되어 나올 테닛의 책에 나온 주장은 대개 거짓이거나 구차한 자기변명이라는 사실을 독자들은 알아야 할 것이다.
네오콘은 철학으로서 이라크 전쟁을 합리화시켰다. 반면 콜린 파월 당시 국무장관은 이라크 침공을 합리화시키는데 들러리를 섰다. 콜린 파월이 그렇게 무력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은 10월22일자 칼럼 ‘콜린 파월과 네오콘’에 나타나 있다. 이라크 침공을 기정사실로 하더라도 미국의 이라크 침공작전은 미군 역사상 가장 허술하게 기획된 작전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작전기획을 잘못한 책임은 당시 중부군 사령관인 토미 프랑크스 중장이 가장 크다. 부시 정권은 바그다드를 점거한 후 통치에 대해서도 확실한 청사진을 갖고 있지 못했다. 이라크에 주둔한 현지 지휘관들은 당시 군정장관 폴 브레머가 상황을 엉망으로 만든 데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지적한다.
이라크 침공은 ‘9-11 테러’에 대한 미국의 대응이었다. 만일에 사담 후세인이 핵무기를 갖고 있다면 이제는 워싱턴에서 핵 테러가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이라크 침공을 초래한 것이다. 그렇다면 9-11 테러를 막지 못하고, 후세인이 대량살상무기를 갖고 있다고 부시 대통령에게 보고한 CIA(중앙정보국)의 책임이야말로 가장 크다고 해야 한다. 9-11 테러와 이라크 침공 당시 CIA 국장은 조지 테닛(George Tenet)이었다.
역사상 가장 무능한 CIA 국장으로 기록될 조지 테닛의 실패를 다루기에 앞서 어떻게 조지 테닛 같은 사람이 CIA 국장이 될 수 있었나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1953년생인 조지 테닛은 조지타운 대학을 나오고 콜럼비아 대학에서 외교학 석사를 했다. 그는 나이 30이 다되어 존 하인즈 상원의원(펜실베이니아 주 출신 공화당 의원. 하인즈 식품회사 상속자이며, 2004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존 케리의 부인인 테레사의 첫 남편이었다. 하인즈 의원은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의 보좌관을 지냈고, 1985년부터 1993년까지 상원 정보위원회의 스태프를 지냈다.
그러던 테닛에게도 햇볕이 들기 시작했다. 1992년 대선에서 대통령에 당선된 클린턴의 정권인수위원회에서 테닛은 정보분과 일을 맡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클린턴 행정부와 인연을 맺게 됐다. 클린턴 대통령은 테닛을 국가안보위원회 정보분과위원장으로 임명했고, 1995년에 CIA 부국장에 임명했다. 첩보 분야와는 전혀 관계가 없던 테닛이 별안간 CIA 부국장이 된 것이다.
1996년 12월, 당시 CIA 국장이던 존 도이치가 별안간 사임했다. 그러자 클린턴은 테닛을 CIA 국장에 임명했다. 테닛이 이렇게 고속승진을 하게 된 것은 사람을 사귀는 것을 중시하는 그의 ‘마당발’ 같은 성격 때문이었다. 그는 특히 영향력이 큰 사람들과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또 그런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했다.
테닛은 클린턴의 두 번째 임기 중 CIA 국장을 지냈다. 테닛은 2001년 초에 새 정부가 들어서면 CIA 국장직을 그만 둘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또한 조지 W. 부시의 인수팀에서도 테닛이 당연히 경질될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은 테닛에게 CIA 국장에 머물러 줄 것을 요청했다. 부시의 이러한 결정에 대해 측근들은 놀랐다. 테닛과 부시와의 관계에 있어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은 아버지 부시였다. 1999년에 테닛은 버지니아 랭리에 있는 CIA 본부건물을 ‘조지 부시 정보센터’라고 명명하고 아버지 부시를 초청해서 성대한 파티를 열었다. (아버지 부시는 상원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후 닉슨 대통령에 의해 CIA 국장에 임명되어 잠시 CIA 국장을 지냈다.) 테닛의 유임은 아버지 부시 덕분이라고 보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2001년 9월11일, 9-11 테러가 발생했다. 전문가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CIA가 무엇을 했느냐고 물었다. 당연히 많은 사람들은 무려 5년 동안 CIA 국장 자리에 앉아 있는 테닛을 지목했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은 테닛을 경질하지 않았다. 아마도 큰일을 수습하는 것이 급할뿐더러, 그런 위기에 CIA 국장을 교체하는 것이 현명치 않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테닛을 경질하지 않은 것은 부시의 최대의 실수 중의 하나로 드러나고 말았다.
냉전(冷戰) 종식 후에 대통령이 된 클린턴은 ‘평화시대의 대통령’이었다. 클린턴 행정부 8년은 군(軍), CIA, 그리고 FBI에 있어 암흑기나 다름없었다. 병역(兵役)이 사라진 70년대 이후 세대인 백악관의 젊은 스태프들은 군 고위장성들을 존중하지 않았다. 병역을 기피한 클린턴 대통령은 군부대 방문을 매우 싫어했다.
취임 초에 클린턴은 제임스 울시를 CIA 국장으로 임명했다. 울시는 전략무기 제한회담 등 군축 문제에 있어 대소(對蘇) 강경입장을 취했던 ‘민주당원 네오콘’이었다. 클린턴이 울시를 CIA 국장에 임명한 것은 민주당내 보수파에 대한 배려였다고 한다. 울시 국장은 재임 중 클린턴 대통령을 단 한번 독대(獨對)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클린턴 대통령을 독대한 것은 1994년에 작은 경비행기가 백악관 앞뜰에 불시착한 사고가 난 후였다. 좌절한 울시는 1995년 1월에 사임했다.
울시의 후임으로 클린턴은 국방차관이던 존 도이치를 임명했다. 존 도이치는 MIT의 화학 교수로서, 정부의 자문역을 맡아 왔었다. 국방에도 문외한(門外漢)이고 첩보에도 문외한인 도이치는 CIA 국장직 제의에 당황했었다고 전해진다. CIA 국장으로서 도이치가 남긴 유일한 업적은 흑인, 여성 등을 CIA 직원으로 많이 고용한 것이었다. CIA를 이끌어 가는 데 한계를 느꼈을 도이치는 1996년 12월 사표를 제출하고 MIT로 돌아갔다. 그 후임으로 클린턴은 부국장이던 조지 테닛을 임명했다. 이처럼 클린턴은 CIA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9-11 테러가 발생하자 조지 테닛은 CIA가 알 케이다의 조직에 침투했지만 핵심에는 근접하지 못해서 9-11을 막지 못했다고 말했다. 9-11 사태 후 네오콘은 그들의 입장을 강화할 수 있는 기회를 포착했다. 더글라스 페이스 국방정책위원장, 폴 울포비츠 국방차관 등 네오콘은 테닛을 좋아하지 않았다. 좋은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한 우수한 인재들인 네오콘이 볼 때 테닛은 그저 정치수완이 좋아서 출세한 ‘건달’에 불과했다. 한편, ‘권력의 추(錘)’가 네오콘으로 기운 것을 모를 리가 없는 테닛은 네오콘을 즐겁게 해야만 했다.
2002년 12월12일, 테닛은 백악관에서 부시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CIA는 사담 후세인이 대량살상무기(WMD)을 갖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를 갖고 있다면서, 그것은 ‘슬램덩크(slam dunk)’ 케이스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이 대화는 워싱턴포스트의 밥 우드워드(Bob Woodward)가 쓴 책 ‘공격 계획(Plan of Attack)’에 의해 세상에 알려 졌다. 2003년 3월 20일, 미군과 영국군은 이라크를 공격했고, 미영(美英) 지상군은 대량살상무기를 샅샅이 찾았으나 결국 발견하지 못했다.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갖고 있다던 테닛의 주장이 틀렸던 것이다. 2004년 6월, 테닛은 부시 대통령에게 사표를 제출했고, 부시는 “테닛이 미국을 위해 탁월하게 봉사했다”면서 사표를 수리했다.
2007년 4월, 테닛의 회고록 ‘폭풍의 한 복판에서(At the Center of the Storm)’가 출간됐다. 테닛은 출판사로부터 선(先)인세 400만 달러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책은 많은 물의를 빚었다. 책에 대한 평가는 절대적으로 좋지 않았다. 신문에 실린 서평은 한결같이 이 책이 “거짓말이고 구차한 변명이며, 위선”이라고 혹평했다. 워싱턴 포스트의 찰스 크라우태머는 “테닛이 마치 자기가 희생양인 것처럼 가장했다”고 비난했다.
테닛은 이 책에서 이라크 침공에 대해 정부 고위급에서 진지한 토론이 없었다고 했으며, 또한 딕 체니 부통령이 독선적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국장정책위원장이던 더글라스 페이스도 비난했다. 그는 특히 2002년 12월에 후세인이 대량살상무기를 갖고 있음은 ‘슬램덩크 케이스’라고 말한 것은 단지 이론적으로 그럴 수 있다는 것일 뿐이라고 변명했다.
테닛이 CIA 국장을 지낼 때 부국장을 지낸 존 맥러핀은 2001년 7월10일에 CIA는 알 케이다의 미(美) 본토 테러 계획이 확정적이라고 판단했다고 폭로해서 테닛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밥 우드워드는 워싱턴 포스트에 기고한 서평에서 테닛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우드워드는 몇 가지 다른 소스를 통해서 보더라도 테닛이 ‘슬램 덩크’라는 표현을 써가면서 부시를 설득했음이 분명하다고 반박했다. 우드워드는 CIA 간부들이 2001년 7월10일에 임박한 테러 위협에 대해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해야 한다고 건의했지만 테닛이 이를 묵살했다고 폭로했다. 우드워드는 이것은 테닛의 ‘임무 포기’라고 신랄하게 비난했다.
책이 나온 후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왜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대해, 테닛은 “대통령은 조치를 취하는 공무원이 아니다”라는 괴상한 답변을 해서 보는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테닛은 그 사실을 당시 안보보좌관이던 콘돌리사 라이스에게 알렸으며, 라이스가 제대로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다고 책에서 언급했다. 이에 대해 라이스 국무장관은 정확한 답변을 피하면서 “내가 언젠가 책을 쓸 기회가 있으면 그 때 사실을 말 하겠다”고 했다.
2007년 8월, CIA 감사관실은 2005년 6월에 작성한 후 기밀로 분류해 온 ‘9-11 자체 보고서’를 공개했다. 보고서는 조지 테닛 전(前) 국장이 전적으로 무능했으며, 9-11 테러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결론내렸다. 보고서는 9-11 테러를 막을 수 있었던 단일한 기회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CIA는 알 케이다의 테러 위협에 대해 대처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테닛은 CIA로부터 자기가 7년간이나 국장으로 있었던 바로 그 CIA로부터 심판을 받은 것이다.
이에 대해 테닛은 자기가 테러에 대비한 대책을 수립했다면서 이 보고서가 잘못됐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상당수의 전직 CIA 요원들은 감사원실의 보고서가 정확하다고 지적했다. 한 전직 요원은 “테닛 국장이 외국 지도자들과 어울리느냐고 너무 바빠서 정보조직을 운영해야 하는 본연의 임무를 망각했다”고 직설적으로 테닛을 비난했다. 또 다른 전직 요원은 “1996년부터 오사마 빈 라덴이 야기하는 위험과 이에 대한 미국 정보기관의 문제점이 테닛의 데스크에 올라 있었지만 그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조지 테닛의 행각(行脚)은 많은 교훈을 준다. 정보기관의 장(長)을 정치적 고려로 임명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 수 있나를 잘 보여준다. 테닛은 알 케이다 테러의 위험은 무시했지만, 이라크의 위험은 과장해서 미국민을 두 번 기만했다. 정치적 배경 외에 자신의 철학이 없는 그는 정치적일 수밖에 없었다. 알 케이다 테러 경고를 무시한 2001년 7월에도, 후세인의 대량살상무기를 과장해서 보고한 2002년 12월에도 그는 정치적이었다. 그것이 부시 행정부와 미국, 그리고 자신을 파멸로 이끌었다. 현재 우리나라 정부의 안보 경제 등 각 분야에서 요직을 맡고 있는 사람들이 그런 자리를 차지하게 된 동기가 대개 ‘정치적’이라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테닛의 실패는 우리에게도 큰 교훈을 준다고 생각된다.
*월간조선 2008년 11월호에는 한국어로 번역 출판될 예정인 테닛의 회고록의 요지가 게재되어 있다. 사정을 잘 알지 못하는 일반 독자들이 이 책만 보게 되면 허위사실을 진실인 것처럼 알게 될 위험성이 있다. 번역되어 나올 테닛의 책에 나온 주장은 대개 거짓이거나 구차한 자기변명이라는 사실을 독자들은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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