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 혼혈 흑인, 카리브 흑인

    기고 / 시민일보 / 2008-11-24 19: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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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돈 (중앙대학교 법학과 교수)
    우리는 오바마를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라고 부르지만, 정작 미국의 공식 인구 센서스에는 ‘흑인(Black)’이란 인종은 없고 ‘아프리칸-아메리칸(African American)’이 있을 뿐이다. 내가 미국에서 공부할 1980년대 초 만해도 ’아프리칸-아메리칸‘이란 용어는 들어 보기 어려웠다. 흑인은 'Black'이라고 부를 뿐이었다. 대략 1980년대 말부터 공식적으로 ‘아프리칸-아메리칸’이란 용어가 쓰이게 되었다. 번역하자면 ‘아프리카계(系) 미국인’이란 말이다. 아시아계는 ‘Asian’이라고 부르면서 흑인은 피부 빛깔로 ‘Black’이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치 않고, 또한 그즈음 ‘아프리카의 자존심(African Pride)’ 같은 용어가 유행한 것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오바마는 케냐에서 온 유학생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말하자면 혼혈(interracial)인 셈이다. 백인과 흑인의 혼혈을 과거에는 물라토(mulatto)라고 불렀지만 2차 대전 후에는 그런 용어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어원(語源)이 튀기 동물을 부르는 말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흑백 혼혈은 남부에서 백인 농장주와 흑인 여자 노예 사이에서 주로 생겼다. 백인 아버지들은 그렇게 태어난 혼혈 자식을 원래의 자기 자식과 같이 집에서 공부를 시키기도 했고, 또 그 어머니와 함께 자유 흑인(free negro)으로 만들어 북부로 보내 주었다. 이들은 북부 대도시로 옮겨가서 학교를 다니고 직업을 가졌다. 오벌린 대학 등 흑인학생을 일찍부터 받은 대학을 초창기에 다닌 흑인들도 대부분이 원래 흑인이 아니라 이런 물라토였다. 물라토들은 자기들만의 사회를 만들어서 유색인종 엘리트 집단을 구성했고, 결혼도 주로 자기들끼리 했다. 백인들도 물라토를 남부 출신 흑인과는 달리 취급했다.

    노예에서 해방된 흑인들은 상당한 기간 동안 남부에서 머물면서 농장에서 막일을 했다. 그러다가 20세기 들어서 북부로의 인구이동이 생기기 시작했고,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해서 군수산업에 많은 인력이 소요됨에 따라 남부 흑인들의 대이동이 생겼다. 한편 20세기 들어서 바베이도스, 자메이카 등 카리브 지역의 흑인들이 미국에 이민으로 들어 왔다. 뉴욕항을 통해 들어 온 이들은 뉴욕 등 북동부에 정착했다. 카리브 흑인들도 원래 고향은 아프리카인데, 노예 상인에게 잡혀서 카리브의 섬에 실려 왔다. 원래 그곳에 살던 인디언들은 거의 소멸해 버렸고 오늘날에는 흑인이 카리브 국가들의 주류(主流)가 되었다.

    카리브 흑인들은 미국에 이민을 와서 소매업으로 성공했다. 뉴욕 할렘에서 유태인들이 하던 가게를 이어 받아 장사했던 흑인들은 대개 카리브 흑인이었다. 카리브 흑인들이 장사에 성공하게 된 원인은 한국 사람들이 미국에 이민을 가서 장사로 성공하는 원인과 비슷할 것이다. 남의 나라에 와서 생존하기 위해선 열심히 일해야 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카리브 지역에선 영어를 썼고, 아무래도 그 사회에서 중간층은 되는 사람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왔기 때문이기 적응이 쉬웠을 것이다. 부시 1기 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지낸 콜린 파월은 자메이카에서 뉴욕으로 이민 온 부모 사이에서 할렘에서 태어났다. 오바마 행정부에서 법무장관으로 발탁된 에릭 홀더는 바베이도스 출신 이민가정에서 태어났다.

    반면 부시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지내고 있는 콘돌리사 라이스의 가계(家系)는 미국 독립 전에 남부에 살아왔다고 한다. 쉽게 말해서 흑인 노예이었던 것이다. 라이스의 조상은 남부에 그대로 머물러 살았고, 라이스의 아버지는 존경받는 장로교 목사였다. 종교적인 아버지가 오늘날의 라이스 장관을 만들었을 것이다.

    사람은 개개인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계층을 일괄적으로 어떻다고 말해서는 아니 된다. 특히 그것이 인종의 경우라면 그러하다. 그러나 내가 경험적으로 느끼기에도, 백인들은 일반적으로 원래의 흑인들보다 물라토와 카리브 흑인들을 더 좋아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미국 남부 출신 흑인들 사이에 ‘저급한 문화’가 팽배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학자나 언론인이 이렇게 언급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인종주의자로 몰릴 수 있기 때문이다.

    흑인인 토머스 소웰 교수에 의하면, 미국에서 노예 생활을 했던 흑인들 사이에 ‘저속한 문화’, 즉 게으르고, 윤리 의식이 부족하고, 맞춤법 틀리는 영어를 쓰고, 학교 그만 두고, 생명을 경시하고, 문란한 풍조가 만연한 것은 영국의 하류 계층이 미국 남부에 정착했고, 흑인들이 이런 백인들의 저속한 문화(redneck culture)에 물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쉽게 말해서 하류 백인의 저질 문화에 노예에서 해방된 흑인들이 오염됐다는 말이다. 반면 북부로 올라간 자유흑인 물라토와 카리브에서 뉴욕 등 동북부로 이민 온 흑인들은 그런 저속한 문화에 오염되지 않아서 학교도 잘 다니고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1960년대에 존슨 대통령이 주창한 ‘위대한 사회’라는 사회복지 프로그램이 확충되자 독신 여성이 아이를 몇명 키우면 연방정부가 주는 아이들 수당으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어 일을 할 의욕을 상실한 것도 흑인의 몰락을 부채질했다. 연방정부가 저급한 공공주택을 대도시에 건설하자 가난한 흑인들이 집세를 걱정하지 않고 살게 된 것도 역시 근로의욕을 저하시키는 데 일조(一助)를 했다. 게다가 마약과 범죄가 흑인 게토에 성행하게 되어 흑인 가정의 붕괴가 가속화하고 말았다. 오늘날 태어나는 흑인 중 70%가 아버지가 없는 사생아라고 하니, 문제가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다. 소웰은 백인 진보주의자들이 흑인의 비극은 ‘노예’로 있었던 데서 비롯한다고 면죄부를 주는 덕분에 흑인들이 더 타락하고 말았다고 지적한다. (상세는 Book World에 실린 토머스 소웰의 ‘블랙 레드넥과 화이트 리버랄’을 참조하기 바람)

    혼혈인 오바마를 두고 인종 간에 견해의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어떤 여론 조사에 의하면 백인의 과반수는 오바마가 흑인이 아니라고 보고, 흑인의 과반수는 오바마를 흑인으로 본다고 한다. 흥미로운 결과가 아닐 수 없다. 내가 1979년에 미국 남부 뉴올린스(허리케인 카트리나로 망가진 미시시피 강 하류에 위치한 인구 100만 규모 도시)에 공부하러 갔을 때, 그 도시의 시장이 더치 모리알(Dutch Morial)이라는 흑인이었다. 뉴올린스의 최초의 흑인 시장이었던 그도 사실은 물라토였다. 그의 가계(家系)는 루이지애나에 일찍이 정착한 프랑스/스페인계(系) 백인과 흑인의 혼혈인 크레올(Creol)이었다. 그의 모습은 전형적인 흑인과는 전혀 달랐지만, 여하튼 그는 최초로 루이지애나 주립대학의 로스쿨을 나온 흑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가 시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흑인 유권자의 압도적인 지지와 토착 백인세력의 지지를 얻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뉴올린스에 오래 살아 온 백인들이 모리알을 지지했던 것이다. 그의 아들 마크 모리알도 뉴올린스 시장을 지냈으나 퇴임 후에 그의 주변 인물들이 부패 혐의로 수사를 받았다.

    그러면 도대체 어느 정도 흑인 피가 섞여야 흑인이 되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그 점은 유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다음에는 이 문제를 다루어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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