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보영 미국 스탠포드 대학교 연구원)
재임기간: 1845-1849 / 단임 / 민주당.
1844년, 민주당이 대통령후보를 지명하기 위한 전당대회를 준비하고 있을 때, 앤드류 잭슨은 제임스 폴크를 자신의 집으로 불러 자신이 그를 지지할 것임을 귀띔한다.
민주당의 정신적 지주였던 잭슨의 이 같은 말은 사실상 대통령 후보의 지명을 의미하고 있었으나 폴크는 흥분하지 않고 차분히 움직였다.
특히 자신이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 것이 아니라 8대 대통령 ‘마틴 밴 뷰런’의 러닝메이트로서 부통령에 출마하고 있음을 상기하면서 뷰런과 그의 지지자들로부터 있을지도 모를 반발에 최대한 신경으로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지지자들에게도 경선을 끝까지 지켜보며 준비를 하되 절대 섣부른 행동은 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오로지 뷰런이 도저히 가망이 없다는 판단이 섰을 때 그때 비로소 행동에 옮기자는 메시지와 함께 말이다.
당내 가장 강력한 후보였던 뷰런이 밀리고 있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정치권의 최대 쟁점이었던 노예제도와 영토확장에 대한 반대가 그 이유였는데 이는 많은 민주당원들을 뷰런에게서 떠나가게 만들었고 그 가운데는 앤드류 잭슨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뷰런의 입장은 북부의 호감을 얻기도 전에 민주당의 텃밭이었던 남부와 서부에서 반대를 불러일으켰고 결국 안방을 내놓는 형국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4년 전 쓰라린 패배를 맛보았던 뷰런은 자신의 화려한 재기를 꿈꾸고 있었지만 이렇게 해서 결국 꿈을 이루지 못하게 된다.
이미 당원들의 마음은 뷰런을 떠났고 그 대안으로 폴크가 새로운 다크호스로 떠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폴크는 사전에 계획했던 데로 뷰런의 지지자들을 규합하여 대통령 후보 지명을 받는데 성공을 한다.
성공적인 지명전 승리를 위해서 그는 뷰런의 대안임을 강조해야만 했다.
그리고 반발을 최소화하기 위해 한번의 임기로 물러날 것을 약속하는데 이 전략이 적중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폴크의 지명은 사실상 의외의 결과였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그가 대통령이 되리라 생각한 이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주지사 선거에서도 두 번씩이나 실패한 야인이 대통령 후보 지명을 받을 수 있는 확률은 매우 낮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변이 속출하는 정치세계에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폴크의 대통령 후보 지명은 엄연히 현실로 다가왔고 새로운 이변으로 창출되었던 것이다.
본선에서는 휘그당을 한 손에 쥐고 있던 1인자 헨리 클레이와 붙게 된다.
치열한 접전 끝에 유권자 투표에서 50 대 48로 가까스로 클레이를 물리친 그는 선거인단 투표에서는 62 대 38의 완벽한 승리를 거머쥐며 드디어 미국 제 11대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미국 개척 초기의 전형적인 농가에서 태어난 그는 10형제 중 맏이였다.
노스 캐로라이나에서 태어났지만 일가친척이 모두 테네시로 이주를 하게 되었고 그의 정치 인생 역시 대부분 테네시에서 이루어졌다.
어릴 때부터 건강이 안 좋았던 그는 항상 집안의 걱정거리였다고 한다.
17살 되던 해에는 요로결석으로 수술을 받게 되었는데 특별한 마취제가 없었던 시기였기에 아주 고통스러운 수술을 받다가 그만 생식능력까지 상실하는 불행을 겪고 만다.
이후 농사일을 배우라는 아버지의 권유를 뒤로 하고 공부를 시작하는데 훗날 변호사가 되어 엘리트의 길을 가게 되는 계기가 된다.
변호사의 길을 걸으면서 지역 인사들과 친분을 쌓은 그는 같은 테네시 지역 출신인 앤드류 잭슨의 대통령 선거를 도우며 정치세계에 발을 들여 놓게 된다.
연설을 잘하고 화술이 뛰어났던 그는 보는 이로 하여금 한눈에 감동케 했으며 스물아홉이라는 젊은 나이에 일찌감치 연방하원에 진출할 수 있게 된다.
하원에서 5선을 하는 동안 탄탄대로를 달리며 연방 하원의장의 자리에까지 오르지만 지역에서 민주당이 밀리고 있으니 내려와서 도와달라는 요청에 의장직을 사임하고 테네시 주지사에 출마를 하게 된다.
근소한 차로 휘그당의 후보를 물리치지만 이후 대통령에 출마하기 전까지 연달아 두 번을 같은 후보에게 패배하는 고배를 마셔야 했다.
그는 미국인들로부터 화려하게 기억되는 대통령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가 대통령으로서 이룬 업적들은 괄목할만하다.
특히 미국 영토의 3분의 1정도가 그에 의해 확장 또는 확정 되었는데 지금의 텍사스, 뉴멕시코, 아리조나, 캘리포니아, 네바다, 유타, 와이오밍, 콜로라도, 워싱턴, 아이다호, 오레곤 등이 이에 포함 된다.
명실공이 동·서로는 대서양에서 태평양까지 남·북으로는 멕시코에서 캐나다까지의 국경시대를 이때 비로소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함께 그는 독립 재무 시스템을 도입하고 관세를 낮추기도 하였는데 이는 보호무역을 주장하던 북부인들에게 미움을 사는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를 북부의 보수 세력과 구분 짓게 하는 것은 이 뿐만이 아니다.
수년 뒤 대규모 비극으로 이어지고 마는 노예제도에 관한 논쟁에서도 그는 노예를 찬성하는 쪽이었던 것이다.
노예를 찬성하고 영토확장에 적극적이었던 그에 대해 기회주의자라는 평가도 함께한다.
이는 각 논점에 대한 그의 접근 방식이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있다가 유리한 쪽으로 붙는 모습을 두고 나온 얘기라 보여지는데 특히 노예제도를 두고 벌어진 갈등에서 ‘미주리 협상’ (미주리주의 미연방 영입을 앞두고 노예제를 인정하는 주와 인정하지 않는 주를 결정하게 했던 협상)의 연장을 주장했던 점과 오레곤 컨트리의 경계를 확정하는 과정에서 의회에 보여준 모습 등은 사전에 미리 계산된 각본에 의한 것이라는 의혹을 벗어날 수 없게 한다.
그의 재임기간 중 가장 큰 사건을 꼽으라면 그것은 영토확장을 두고 벌어진 멕시코와의 전쟁일 것이다.
이 전쟁은 폴크가 캘리포니아 등을 매입하기 위해 멕시코에 사절을 보내면서 시작된다.
당시 텍사스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있던 멕시코는 오히려 캘리포니아까지 팔라고 미국이 사절을 보내자 바짝 약이 오르게 되고 절차상에 하자를 문제 삼아 사절을 박대하여 미국으로 돌려 보낸다.
폴크는 이를 두고 미국에 대한 모욕이라 단정하며 의회에 전쟁선언 결의를 요청하기에 이르는데 바로 그때 국경에 나가 있는 부대로부터 멕시코의 공격으로 11명의 미국군인이 전사했다는 보고를 받게 된다.
옳다구나 싶던 폴크는 바로 의회로 뛰어가 지금 멕시코가 쳐들어와 미국인들을 죽이고 그 피를 우리땅에 뿌리고 있으니 서둘러 전쟁결의를 해줄 것을 요청하게 된다.
사실 문제가 있었던 국경지역은 미국과 멕시코가 모두 자신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분쟁지역이었다.
게다가, 폴크가 보낸 미국군이 먼저 점령하며 멕시코인들의 상업활 동을 제한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멕시코의 정당한 대응이라고도 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의회는 폴크의 주장을 의아해 하면서도 자신들의 애국심이 혹 의심받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에 결국 전쟁결의를 통과시키게 된다. 이에 폴크는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여 미국-멕시코 전쟁을 일으킨다.
월등한 군사력의 미군은 국경을 넘어 멕시코 시티를 함락시키고 파죽지세로 멕시코 정부를 밀어붙이게 된다.
수도까지 함락당한 멕시코는 한동안 버티다가 과달루프 조약에 서명을 함으로써 수모로 얼룩진 전쟁은 끝이 나는데 패자인 멕시코는 단돈 1500만불에 캘리포니아, 아리조나, 네바다, 유타, 콜로라도, 뉴멕시코의 광활한 서부영토를 미국에 넘기게 된다.
미국으로서야 큰 이익을 남긴 사건이겠지만 영토의 절반을 잃은 멕시코의 입장으로서는 천추의 한이 되는 가슴 아픈 역사이기도 하다.
강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제국주의의 단면을 보여준 이 전쟁은 미국으로 하여금 침략자라는 비난을 피할 수가 없게 한다.
그러나 어찌하랴?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당시 국제사회에서 허울뿐인 명분은 총칼 앞에 고개를 떨굴 수 밖에 없었음을.
폴크는 약속한데로 단임을 마지막으로 대통령직을 물러났다.
하지만 건강악화로 세달 뒤 숨을 거두는데 누가 더 하라고 했어도 아마 하지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1776년 독립에서 시작된 미국이 루이지아나 매입을 거쳐 텍사스와 서부 일대의 광활한 영토까지 접수하여 명실상부한 세계 최대강대국으로 발돋음하는데 폴크가 기여한 바는 매우 크다 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침략자라는 꼬리표 또한 그의 이름과 영원히 함께 하지 않을까?
재임기간: 1845-1849 / 단임 / 민주당.
1844년, 민주당이 대통령후보를 지명하기 위한 전당대회를 준비하고 있을 때, 앤드류 잭슨은 제임스 폴크를 자신의 집으로 불러 자신이 그를 지지할 것임을 귀띔한다.
민주당의 정신적 지주였던 잭슨의 이 같은 말은 사실상 대통령 후보의 지명을 의미하고 있었으나 폴크는 흥분하지 않고 차분히 움직였다.
특히 자신이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 것이 아니라 8대 대통령 ‘마틴 밴 뷰런’의 러닝메이트로서 부통령에 출마하고 있음을 상기하면서 뷰런과 그의 지지자들로부터 있을지도 모를 반발에 최대한 신경으로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지지자들에게도 경선을 끝까지 지켜보며 준비를 하되 절대 섣부른 행동은 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오로지 뷰런이 도저히 가망이 없다는 판단이 섰을 때 그때 비로소 행동에 옮기자는 메시지와 함께 말이다.
당내 가장 강력한 후보였던 뷰런이 밀리고 있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정치권의 최대 쟁점이었던 노예제도와 영토확장에 대한 반대가 그 이유였는데 이는 많은 민주당원들을 뷰런에게서 떠나가게 만들었고 그 가운데는 앤드류 잭슨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뷰런의 입장은 북부의 호감을 얻기도 전에 민주당의 텃밭이었던 남부와 서부에서 반대를 불러일으켰고 결국 안방을 내놓는 형국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4년 전 쓰라린 패배를 맛보았던 뷰런은 자신의 화려한 재기를 꿈꾸고 있었지만 이렇게 해서 결국 꿈을 이루지 못하게 된다.
이미 당원들의 마음은 뷰런을 떠났고 그 대안으로 폴크가 새로운 다크호스로 떠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폴크는 사전에 계획했던 데로 뷰런의 지지자들을 규합하여 대통령 후보 지명을 받는데 성공을 한다.
성공적인 지명전 승리를 위해서 그는 뷰런의 대안임을 강조해야만 했다.
그리고 반발을 최소화하기 위해 한번의 임기로 물러날 것을 약속하는데 이 전략이 적중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폴크의 지명은 사실상 의외의 결과였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그가 대통령이 되리라 생각한 이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주지사 선거에서도 두 번씩이나 실패한 야인이 대통령 후보 지명을 받을 수 있는 확률은 매우 낮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변이 속출하는 정치세계에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폴크의 대통령 후보 지명은 엄연히 현실로 다가왔고 새로운 이변으로 창출되었던 것이다.
본선에서는 휘그당을 한 손에 쥐고 있던 1인자 헨리 클레이와 붙게 된다.
치열한 접전 끝에 유권자 투표에서 50 대 48로 가까스로 클레이를 물리친 그는 선거인단 투표에서는 62 대 38의 완벽한 승리를 거머쥐며 드디어 미국 제 11대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미국 개척 초기의 전형적인 농가에서 태어난 그는 10형제 중 맏이였다.
노스 캐로라이나에서 태어났지만 일가친척이 모두 테네시로 이주를 하게 되었고 그의 정치 인생 역시 대부분 테네시에서 이루어졌다.
어릴 때부터 건강이 안 좋았던 그는 항상 집안의 걱정거리였다고 한다.
17살 되던 해에는 요로결석으로 수술을 받게 되었는데 특별한 마취제가 없었던 시기였기에 아주 고통스러운 수술을 받다가 그만 생식능력까지 상실하는 불행을 겪고 만다.
이후 농사일을 배우라는 아버지의 권유를 뒤로 하고 공부를 시작하는데 훗날 변호사가 되어 엘리트의 길을 가게 되는 계기가 된다.
변호사의 길을 걸으면서 지역 인사들과 친분을 쌓은 그는 같은 테네시 지역 출신인 앤드류 잭슨의 대통령 선거를 도우며 정치세계에 발을 들여 놓게 된다.
연설을 잘하고 화술이 뛰어났던 그는 보는 이로 하여금 한눈에 감동케 했으며 스물아홉이라는 젊은 나이에 일찌감치 연방하원에 진출할 수 있게 된다.
하원에서 5선을 하는 동안 탄탄대로를 달리며 연방 하원의장의 자리에까지 오르지만 지역에서 민주당이 밀리고 있으니 내려와서 도와달라는 요청에 의장직을 사임하고 테네시 주지사에 출마를 하게 된다.
근소한 차로 휘그당의 후보를 물리치지만 이후 대통령에 출마하기 전까지 연달아 두 번을 같은 후보에게 패배하는 고배를 마셔야 했다.
그는 미국인들로부터 화려하게 기억되는 대통령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가 대통령으로서 이룬 업적들은 괄목할만하다.
특히 미국 영토의 3분의 1정도가 그에 의해 확장 또는 확정 되었는데 지금의 텍사스, 뉴멕시코, 아리조나, 캘리포니아, 네바다, 유타, 와이오밍, 콜로라도, 워싱턴, 아이다호, 오레곤 등이 이에 포함 된다.
명실공이 동·서로는 대서양에서 태평양까지 남·북으로는 멕시코에서 캐나다까지의 국경시대를 이때 비로소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함께 그는 독립 재무 시스템을 도입하고 관세를 낮추기도 하였는데 이는 보호무역을 주장하던 북부인들에게 미움을 사는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를 북부의 보수 세력과 구분 짓게 하는 것은 이 뿐만이 아니다.
수년 뒤 대규모 비극으로 이어지고 마는 노예제도에 관한 논쟁에서도 그는 노예를 찬성하는 쪽이었던 것이다.
노예를 찬성하고 영토확장에 적극적이었던 그에 대해 기회주의자라는 평가도 함께한다.
이는 각 논점에 대한 그의 접근 방식이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있다가 유리한 쪽으로 붙는 모습을 두고 나온 얘기라 보여지는데 특히 노예제도를 두고 벌어진 갈등에서 ‘미주리 협상’ (미주리주의 미연방 영입을 앞두고 노예제를 인정하는 주와 인정하지 않는 주를 결정하게 했던 협상)의 연장을 주장했던 점과 오레곤 컨트리의 경계를 확정하는 과정에서 의회에 보여준 모습 등은 사전에 미리 계산된 각본에 의한 것이라는 의혹을 벗어날 수 없게 한다.
그의 재임기간 중 가장 큰 사건을 꼽으라면 그것은 영토확장을 두고 벌어진 멕시코와의 전쟁일 것이다.
이 전쟁은 폴크가 캘리포니아 등을 매입하기 위해 멕시코에 사절을 보내면서 시작된다.
당시 텍사스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있던 멕시코는 오히려 캘리포니아까지 팔라고 미국이 사절을 보내자 바짝 약이 오르게 되고 절차상에 하자를 문제 삼아 사절을 박대하여 미국으로 돌려 보낸다.
폴크는 이를 두고 미국에 대한 모욕이라 단정하며 의회에 전쟁선언 결의를 요청하기에 이르는데 바로 그때 국경에 나가 있는 부대로부터 멕시코의 공격으로 11명의 미국군인이 전사했다는 보고를 받게 된다.
옳다구나 싶던 폴크는 바로 의회로 뛰어가 지금 멕시코가 쳐들어와 미국인들을 죽이고 그 피를 우리땅에 뿌리고 있으니 서둘러 전쟁결의를 해줄 것을 요청하게 된다.
사실 문제가 있었던 국경지역은 미국과 멕시코가 모두 자신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분쟁지역이었다.
게다가, 폴크가 보낸 미국군이 먼저 점령하며 멕시코인들의 상업활 동을 제한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멕시코의 정당한 대응이라고도 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의회는 폴크의 주장을 의아해 하면서도 자신들의 애국심이 혹 의심받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에 결국 전쟁결의를 통과시키게 된다. 이에 폴크는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여 미국-멕시코 전쟁을 일으킨다.
월등한 군사력의 미군은 국경을 넘어 멕시코 시티를 함락시키고 파죽지세로 멕시코 정부를 밀어붙이게 된다.
수도까지 함락당한 멕시코는 한동안 버티다가 과달루프 조약에 서명을 함으로써 수모로 얼룩진 전쟁은 끝이 나는데 패자인 멕시코는 단돈 1500만불에 캘리포니아, 아리조나, 네바다, 유타, 콜로라도, 뉴멕시코의 광활한 서부영토를 미국에 넘기게 된다.
미국으로서야 큰 이익을 남긴 사건이겠지만 영토의 절반을 잃은 멕시코의 입장으로서는 천추의 한이 되는 가슴 아픈 역사이기도 하다.
강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제국주의의 단면을 보여준 이 전쟁은 미국으로 하여금 침략자라는 비난을 피할 수가 없게 한다.
그러나 어찌하랴?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당시 국제사회에서 허울뿐인 명분은 총칼 앞에 고개를 떨굴 수 밖에 없었음을.
폴크는 약속한데로 단임을 마지막으로 대통령직을 물러났다.
하지만 건강악화로 세달 뒤 숨을 거두는데 누가 더 하라고 했어도 아마 하지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1776년 독립에서 시작된 미국이 루이지아나 매입을 거쳐 텍사스와 서부 일대의 광활한 영토까지 접수하여 명실상부한 세계 최대강대국으로 발돋음하는데 폴크가 기여한 바는 매우 크다 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침략자라는 꼬리표 또한 그의 이름과 영원히 함께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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