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책 변호사)
'종교적 고난은 현실적 고난의 표현인 동시에 현실적 고난에 대한 항의다. 종교는 억압받는 피조물의 한숨이며, 무정한 세계의 감정이며, 영혼 없는 상황의 영혼이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카를 마르크스가 1843년 신혼여행에서 갓 돌아와 쓴 '헤겔의 법철학 비판 서설'에 나오는 말입니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는 말은 이후 과학주의자와 이신론자(理神論者)를 포함해 광범위한 무신론자들이 종교를 비판할 때 가장 많이 인용하는 구절입니다. 이 글을 썼을 때 마르크스는 스물다섯살 약관의 나이였습니다. 그가 편집장으로 있으면서 기존 체제를 공격하던 '라인신문'이 폐간당한 뒤입니다. 당연히 종교도 기존 체제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막상 이 글을 쓴 마르크스는 역사상 가장 많은 신도를 거느린 종교를 만들게 됩니다. 그 종교는 한때 지구의 절반을 넘게 퍼져갔습니다. 바로 마르크스교, 우리가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라고 부르는 종교가 그것입니다. 이 글을 쓸 무렵 마르크스는 헤겔에 경도되어 있었을 뿐 아직 자신의 종교 교리를 채 다듬기 전이었습니다. 또 비슷한 교리를 내세운 여러 사제들도 많았습니다. 예를 들면 무정부주의를 주창하던 프루동 같은 사람입니다. 마르크스교의 교리는 그로부터 4반세기가 지난 1867년 런던에서 완성됩니다. 바로 그의 대표 저작인 '자본'입니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종교를 과학이라고 말합니다. 대단한 '자만'입니다. 부르주아혁명을 거쳐 프롤레타리아혁명으로 진행하면서 자본주의가 망하고 공산주의가 필연적으로 들어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존 종교와는 사뭇 다릅니다. 그러나 마르크스나 그를 숭배해 그 교리를 실천한 레닌, 스탈린, 모택동, 카스트로, 김일성, 김정일이 꿈꾸던 유토피아는 지구 어디에도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쉽게 말해 그건 사기였습니다. 인민을 자유롭게 한다던 교리와는 정반대로 스탈린은 곡창지대였던 우크라이나에서만 6백만명이 넘는 농민을 죽게 만들었습니다. 히틀러의 수용소를 능가한 스탈린의 수용소는 솔제니친이 이미 '수용소군도'로서 고발한 바 있습니다. 김정일의 북한에서는 오늘도 굶어 죽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얼마 전 우리 방송에 나왔던 토끼풀을 뜯던 젊은 여성은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죽었다고 합니다.
마르크스교가 말하는 유토피아에는 종교가 없습니다. 마르크스 자신이 유대인이었고 아버지가 기독교로 개종했지만 그는 유대교도 기독교도 버렸습니다. 그는 철저히 종교를 경멸했습니다. 마르크스교의 제자들, 사이비 신도들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 종교의 이단이라 할 수 있는 김일성 김정일의 종교도 그렇습니다. 그들의 종교는 '종교를 경멸하는 교리'를 가진 종교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인민의 자유가 결코 인민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자유를 경멸하는, 우리 안에 갇혀 있는 짐승의 자유'인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지금 우리 종교계가 들썩이고 있습니다. 조계종은 부인하지만, 정부와 각을 세우고 한나라당 당료의 출입까지 막게 된 것은 템플스테이 예산을 깎고 방재시스템 예산을 삭감한 때문입니다. 언제나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야 할 산문(山門)이 특정인들의 출입을 막게 됐습니다. 이 정권 동안 템플스테이 예산 지원을 거부하겠다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앞으로 소박하게 사찰에 오는 손님들만 불교적 방식으로 맞이하겠다'고 했습니다. 4대강 살리기 반대를 다시 들먹이기도 했습니다.
그 4대강 때문에 가톨릭은 큰 어른인 추기경과 사제들이 맞붙었습니다. 추기경은 얼마 전 기자들에게 '4대강 사업이 자연파괴와 난개발의 위험이 보인다고 했지 반대한다는 소리를 한 것은 아니다'고 말했습니다. 4대강에 반대하는 사제들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추기경의 용퇴를 주장했습니다. '양심과 이성에 비추어보더라도 4대강사업은 중단돼야 한다'고 소리 높여 외치고 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북한은 진리를 차단하고 자유가 없다'는 추기경의 말씀을 두고 '골수 반공주의자'로 몰아붙인 것입니다.
나는 성직자를 존경합니다. 그분들은 혼탁한 우리 사회에 등불 같은 존재들입니다. 지금도 묵묵히 구도의 길을 걷는 많은 스님과 신부님들이 있다는 것을 나는 믿습니다. 그런 분들이 계신다는 것만으로도 대중들은 위안을 받습니다. 그리고 속세의 고통을 이겨냅니다.
4대강살리기를 한다면서 보를 높이 세우고 6미터씩 바닥을 파내고 자전거길을 만들고 강변을 유원지처럼 꾸미는 걸 나도 반대합니다. 그러나 강은 살려야 합니다. 사법부에서도 그 정당성에 대해 판결이 내려지고 있습니다. 그렇든 아니든 종교가 특정 정책에 대한 가부를 판단하고 선동해선 안 됩니다. 그건 종교 본연의 영역을 벗어나는 일입니다. 마르크스가 말하는 '아편'이 되는 길입니다. 더군다나 종교가 북한의 현실을 왜곡하고, 그 비판을 나무라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북한 김정일은 바로 종교의 적입니다. 그것도 그냥 적이 아닌, 종교를 멸실시키려 하는 적입니다.
나는 오히려 국가 예산으로 벌이는 종교사업을 반대합니다. 템플스테이는 대중에게 선을 가르치고 진리의 입구를 보여주는 참 좋은 사업입니다. 그러나 그 일이 국가 예산으로 이뤄진다면 나는 반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의탁은 제법무아(諸法無我)를 설하신 부처님이 고개를 저을 것이라 믿습니다. 그리고 나는 천주교 사제들이 말하는 '양심과 이성'이 도대체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 궁금합니다. 신앙에서 말해지는 양심이란 단어, 이성이란 단어는 참으로 숙고해야 할 단어입니다. 오랜 기도 끝에 나온 답이어야 합니다. 나는 적어도 하느님이 국가의 정책에 대한 종교의 간섭을 '양심과 이성'이란 단어를 남용하게 하면서까지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눈을 크게 뜨십시오. 오늘 아침 문득 '종교는 성직자의 아편인가?'라는 의문을 가졌습니다.
'종교적 고난은 현실적 고난의 표현인 동시에 현실적 고난에 대한 항의다. 종교는 억압받는 피조물의 한숨이며, 무정한 세계의 감정이며, 영혼 없는 상황의 영혼이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카를 마르크스가 1843년 신혼여행에서 갓 돌아와 쓴 '헤겔의 법철학 비판 서설'에 나오는 말입니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는 말은 이후 과학주의자와 이신론자(理神論者)를 포함해 광범위한 무신론자들이 종교를 비판할 때 가장 많이 인용하는 구절입니다. 이 글을 썼을 때 마르크스는 스물다섯살 약관의 나이였습니다. 그가 편집장으로 있으면서 기존 체제를 공격하던 '라인신문'이 폐간당한 뒤입니다. 당연히 종교도 기존 체제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막상 이 글을 쓴 마르크스는 역사상 가장 많은 신도를 거느린 종교를 만들게 됩니다. 그 종교는 한때 지구의 절반을 넘게 퍼져갔습니다. 바로 마르크스교, 우리가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라고 부르는 종교가 그것입니다. 이 글을 쓸 무렵 마르크스는 헤겔에 경도되어 있었을 뿐 아직 자신의 종교 교리를 채 다듬기 전이었습니다. 또 비슷한 교리를 내세운 여러 사제들도 많았습니다. 예를 들면 무정부주의를 주창하던 프루동 같은 사람입니다. 마르크스교의 교리는 그로부터 4반세기가 지난 1867년 런던에서 완성됩니다. 바로 그의 대표 저작인 '자본'입니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종교를 과학이라고 말합니다. 대단한 '자만'입니다. 부르주아혁명을 거쳐 프롤레타리아혁명으로 진행하면서 자본주의가 망하고 공산주의가 필연적으로 들어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존 종교와는 사뭇 다릅니다. 그러나 마르크스나 그를 숭배해 그 교리를 실천한 레닌, 스탈린, 모택동, 카스트로, 김일성, 김정일이 꿈꾸던 유토피아는 지구 어디에도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쉽게 말해 그건 사기였습니다. 인민을 자유롭게 한다던 교리와는 정반대로 스탈린은 곡창지대였던 우크라이나에서만 6백만명이 넘는 농민을 죽게 만들었습니다. 히틀러의 수용소를 능가한 스탈린의 수용소는 솔제니친이 이미 '수용소군도'로서 고발한 바 있습니다. 김정일의 북한에서는 오늘도 굶어 죽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얼마 전 우리 방송에 나왔던 토끼풀을 뜯던 젊은 여성은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죽었다고 합니다.
마르크스교가 말하는 유토피아에는 종교가 없습니다. 마르크스 자신이 유대인이었고 아버지가 기독교로 개종했지만 그는 유대교도 기독교도 버렸습니다. 그는 철저히 종교를 경멸했습니다. 마르크스교의 제자들, 사이비 신도들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 종교의 이단이라 할 수 있는 김일성 김정일의 종교도 그렇습니다. 그들의 종교는 '종교를 경멸하는 교리'를 가진 종교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인민의 자유가 결코 인민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자유를 경멸하는, 우리 안에 갇혀 있는 짐승의 자유'인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지금 우리 종교계가 들썩이고 있습니다. 조계종은 부인하지만, 정부와 각을 세우고 한나라당 당료의 출입까지 막게 된 것은 템플스테이 예산을 깎고 방재시스템 예산을 삭감한 때문입니다. 언제나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야 할 산문(山門)이 특정인들의 출입을 막게 됐습니다. 이 정권 동안 템플스테이 예산 지원을 거부하겠다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앞으로 소박하게 사찰에 오는 손님들만 불교적 방식으로 맞이하겠다'고 했습니다. 4대강 살리기 반대를 다시 들먹이기도 했습니다.
그 4대강 때문에 가톨릭은 큰 어른인 추기경과 사제들이 맞붙었습니다. 추기경은 얼마 전 기자들에게 '4대강 사업이 자연파괴와 난개발의 위험이 보인다고 했지 반대한다는 소리를 한 것은 아니다'고 말했습니다. 4대강에 반대하는 사제들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추기경의 용퇴를 주장했습니다. '양심과 이성에 비추어보더라도 4대강사업은 중단돼야 한다'고 소리 높여 외치고 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북한은 진리를 차단하고 자유가 없다'는 추기경의 말씀을 두고 '골수 반공주의자'로 몰아붙인 것입니다.
나는 성직자를 존경합니다. 그분들은 혼탁한 우리 사회에 등불 같은 존재들입니다. 지금도 묵묵히 구도의 길을 걷는 많은 스님과 신부님들이 있다는 것을 나는 믿습니다. 그런 분들이 계신다는 것만으로도 대중들은 위안을 받습니다. 그리고 속세의 고통을 이겨냅니다.
4대강살리기를 한다면서 보를 높이 세우고 6미터씩 바닥을 파내고 자전거길을 만들고 강변을 유원지처럼 꾸미는 걸 나도 반대합니다. 그러나 강은 살려야 합니다. 사법부에서도 그 정당성에 대해 판결이 내려지고 있습니다. 그렇든 아니든 종교가 특정 정책에 대한 가부를 판단하고 선동해선 안 됩니다. 그건 종교 본연의 영역을 벗어나는 일입니다. 마르크스가 말하는 '아편'이 되는 길입니다. 더군다나 종교가 북한의 현실을 왜곡하고, 그 비판을 나무라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북한 김정일은 바로 종교의 적입니다. 그것도 그냥 적이 아닌, 종교를 멸실시키려 하는 적입니다.
나는 오히려 국가 예산으로 벌이는 종교사업을 반대합니다. 템플스테이는 대중에게 선을 가르치고 진리의 입구를 보여주는 참 좋은 사업입니다. 그러나 그 일이 국가 예산으로 이뤄진다면 나는 반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의탁은 제법무아(諸法無我)를 설하신 부처님이 고개를 저을 것이라 믿습니다. 그리고 나는 천주교 사제들이 말하는 '양심과 이성'이 도대체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 궁금합니다. 신앙에서 말해지는 양심이란 단어, 이성이란 단어는 참으로 숙고해야 할 단어입니다. 오랜 기도 끝에 나온 답이어야 합니다. 나는 적어도 하느님이 국가의 정책에 대한 종교의 간섭을 '양심과 이성'이란 단어를 남용하게 하면서까지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눈을 크게 뜨십시오. 오늘 아침 문득 '종교는 성직자의 아편인가?'라는 의문을 가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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