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우리는 영롱한 샛별을 만났다. 영화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를 통해 청순한 모습을 비추더니 섹시한 분위기의 노래 ‘눈동자’로 동 시대 젊은이들의 가슴 속에 사뿐히 내려 앉았다.
이후 2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당시 그녀의 눈빛, 목소리에 웃고 울던 남성들은 하나 둘 반려를 찾고, 행복한 가정을 꾸렸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도 혼자다. 가수 겸 배우 엄정화(42·사진) 얘기다.
‘결혼 계획’을 물었다. “아무 생각이 없어요. 사람이 있어야 생각할 것 아니겠어요? 제가 계획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구요. 어머니는 전에는 안 그러셨지만 30대 후반이 되면서부터 걱정하기는 하는데…”라면서 “친한 후배들이 하나 둘 결혼하니 자극 안 받느냐고들 하는데, 전혀요.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행복을 빌어주죠”라며 웃는다.
차분한 음성에서는 연륜이 묻어났다. 무대와 안방극장, 스크린을 통해 섹시함과 청순함을 넘나들던 10여년 전이나 별로 달라진 것 없는 앳된 인상 만으로는 그녀가 이제 불혹의 나이를 넘겼다니 믿으려 해도 믿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엄정화는 1일 개봉한 영화 ‘마마’(감독 최익환)에서 뒤센 근이양증이라는 희소병으로 앞으로 5년 밖에는 살 수 없는 11세 원재(이형석)의 싱글맘 ‘동숙’을 열연했다. 결혼도 안 한 처녀가 아줌마, 그것도 초등학생 아들을 가진 엄마 역할을 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웠을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들어오는 배역들이 엄마 역할이더군요. 제 나잇대 여배우의 숙명이죠. 물론 아직 결혼도 안 한 처지라 아들을 둔 엄마의 마음을 느낄 순 없지만 그래도 여자니까 엄마의 마음을 많이 생각하면서 연기했지요.”
엄마 연기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영화 ‘오로라 공주’(2005), ‘해운대’(2009), ‘베스트셀러’(2010)에서도 했다. 하지만 그때와 이번은 다르다. 생활비는 물론 아들 치료비, 게다가 아들의 꿈인 세계일주 여행을 위한 자금을 모으기 위해 야쿠르트 배달은 물론 온갖 궂은 일도 마다 않는 설정이다. 때문에 야쿠르트 아줌마 제복이나 청바지와 티셔츠 같은 평범한 옷차림에 화장기 거의 없는 얼굴로 이제까지의 화려하거나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벗어던졌다. 살찌는 것도 기꺼이 감수했다.
엄정화는 그런 변신이 오히려 즐거웠다. “의상이나 메이크업의 굴레에서 벗어나 리얼하게 엄마를 연기할 수 있다는 것에 끌렸죠.”
엄정화는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보며 가장 많이 울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들의 시한부 생명도 모자라 난소암 말기라는 청천벽력 같은 진단까지 받게 된다. “사실 영화가 슬프기만 했으면 출연하기가 부담스러웠을 거에요. 그런데 이 영화는 가족애를 통해 희망을 얘기하고, 긍정의 힘을 추구하거든요. 그래서 출연을 결심했죠.”
이 영화에서 난소암 판정을 받은 엄마는 아들과 자살을 기도한다. 하지만 잠든 아들이 잠꼬대처럼 ‘희망’에 관해 속삭이는 소리를 듣고 용기를 낸다. 그리고 잘못하면 깨어날 수 없다는 대수술을 받기로 한다. 엄마의 수술날, 홀로 남아 불안하고 힘들어하는 아들의 핸드폰에 갑자기 문자가 뜬다. 이윽고 계속 답지하는 문자들…. 아들의 힘을 북돋아주고, 격려하는 이웃들의 문자다.
“시나리오를 보면서 ‘마마’는 관객들에게 왠지 힘을 줄 수 있는 영화가 될 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더불어 평소 마음은 갖고 있지만 실천하지 못했던 엄마께, 부모님께 사랑한다고 문자 하나, 전화 한 통을 더 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했어요. 희망과 응원이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키는 것인지를 증명해줄 수 있는 영화가 아닐까 싶어요.”
엄정화는 5월23일 ‘마마’ VIP시사회에 모친을 초대해 영화를 함께 봤다. 남편이 교통사고로 떠나면서 스물여덟 젊은 나이에 홀로 됐지만 떡볶이, 오뎅 포장마차를 하면서도 엄정화와 엄태웅(37) 등 자녀 넷을 훌륭하게 키워낸 어머니다.
“영화를 보고 엄마가 슬프고, 마음도 아팠지만 아주 좋았다고 하시더군요. 그런데 미안하기도 했어요. 극중 홀어머니 옥주(김해숙)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승철(유해진)처럼 해드리지 못해서요. 지금까지 같이 여행을 가겠다는 약속을 못 지켰는데 올해만큼은 어디든지 어머니와 꼭 함께 가보려고 해요.”
당분간 노래보다는 연기에 주력할 계획이다. “전에는 1년에 음반을 두 장씩 내곤 했는데 이제는 그렇게 활동하는 시기는 아닌 것 같아요, 내년 정도 음반을 낼까 하지만 급하게 생각하지 않고 여유있게 하려구요.”
다행스러운 소식이 있다. 엄정화가 다음 영화로 ‘댄싱 퀸’(감독 이석훈)을 찍는다. 서울시장 후보(황정민)의 부인이 남편 몰래 댄스가수에 도전한다는 내용이니 오랫만에 원조 섹시가수의 실력을 지켜본다는 기대에 벌써부터 설렌다.
‘마마’는 할리우드 대작들의 공세가 어느 때 보다 거센 시기에 개봉했다. 한 마디로 대진운이 좋지 못하다. 엄정화도 잘 알고 있다. 그래도 자신감이 넘친다. “저희 영화는 스스로를 격려하게 하는 영화, 마음을 살찌게 하는 영화에요. 좋은 에너지를 가득 담은 영화의 주연배우가 용기를 잃을 수는 없죠?”
한편 엄정화가 최근 논란을 겪고 있는 ‘나는 가수다’ 출연자 옥주현을 감싸며 좋은 에너지를 담은 글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엄정화는 “‘나는 가수다’에서 옥주현의 노래를 들었는데 아주 잘하고, 열심히 하더군요”라면서 “그런데 왜들 비난하는지 모르겠어요. 박수쳐주면 안 되나요? 잘 했잖아요, 다들 들었잖아요?”라며 안타까워 했다.
엄정화는 스타들의 자살 원인이 될 정도로 사회 문제화하고 있는 인터넷 악플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누군가가 안 좋은 일을 겪거나 힘든 일이 있을 때는 격려해주고 같이 안타까워하고 걱정해줬으면 합니다”며 “경우에 따라서는 잘잘못을 따지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그런 것은 언제든지 할 수 있는 일 아닌가요?”라고 반문했다.
내친김에 자신이 지난해 엠넷 ‘슈퍼스타 K2’에 심사위원으로 출연하는 동안 겪은 악플의 공포에 대해서도 토로했다.
“사실 그 전까지는 인터넷에 올라오는 글은 잘 보지도 않았고, 악플 같은 것이 별거 아닐 거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막상 그런 것들을 직접 겪게 되니 하루하루가 너무 힘들더군요.”
“말 한 마디가 천냥 빚을 갚듯이 좋은 에너지가 좋은 결과를 가져오죠. 사람을 살리는 메시지의 쾌감이 악플의 재미보다 몇 천배 좋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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