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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제국 전 국방부 정책실장)
최근 주한미군 기지의 고엽제 매몰 문제가 불거지면서 ‘동맹과 환경’의 문제가 새로운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제초제의 일종인 고엽제는 식물의 엽록소를 파괴해 고사(枯死)시키는 다이옥신을 포함하고 있어 폐암·후두암·당뇨병 등 각종 질병을 유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1960년대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한국군 장병들이 고엽제의 후유증으로 아직도 고생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번 사안은 문제 제기 주체로부터 문제 해결 과정에 이르기까지 과거와 다른 점이 있다. 첫째, 문제 제기 주체를 보면, 지금까지 대부분 미군기지 환경 문제는 인근지역 주민과 환경단체들이 제기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그런데 이번에는 우리 국민이 아닌 주한미군으로 복무했던 미 장병들이 문제를 제기했다는 데 특징이 있다. 1970년대 말 미군기지 캠프 캐럴에서 근무했던 스티브 하우스 씨가 1978년 고엽제로 알려진 ‘노란색 드럼통’ 250개를 기지 안에 묻었다는 증언이 발단이 됐다. 이어 전역한 미군 레이 바우스 씨는 캠프 머서에도 ‘화학물질’을 묻었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미국 측 관계자들이 먼저 문제를 제기했다는 것은 한미동맹이 건강하다는 것을 뜻한다. 주한미군 장병도 이제는 한국을 ‘남의 나라’가 아닌 모국(미국)처럼 사랑하는 ‘진정한 동맹 파트너’로 생각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둘째, 사안의 성격을 보면, 고엽제는 인간 건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강한 독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만약 제보자들의 증언이 사실로 판명되면 이는 유류누출 등에 따른 환경오염에 비해 훨씬 심각하고 실질적인 문제다. 2001년에 개정된 SOFA의 환경관련 규정(환경보호 특별양해각서)에 의하면, ‘인간 건강에 급박하고 실질적인 위험(KISE: known, imminent, substantial endangerment)’을 가져오는 오염원에 대해서는 미국 측이 신속하게 치유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유류 오염은 KISE에 해당하는지를 놓고 한미 간 이견이 있어 문제 해결에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고엽제에 의한 오염은 KISE에 해당하는 급박하고 실질적인 위험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 만큼 미군기지에 고엽제가 묻혀 있는 것이 사실로 밝혀지면 관련규정에 따라 신속하고 철저한 치유와 처리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셋째, 문제에 접근하는 정부 관계 당국의 대응방식이 신속하고 적절하며 미국 측의 태도 역시 그 어느 때보다 전향적이고 협조적이다. 이는 한미동맹의 성숙함을 대변하는 또 다른 반증이다.
이미 지난 일이지만 2000년대 중반 반환 미군기지의 환경문제와 관련해 정부 내 관련부처 간의 협의·조정 및 한미 간의 협조도 어려웠다. 그 사이에 미군기지의 환경문제는 조기에 정치화돼 정치적 갈등과 사회적 분열을 낳았고, 나아가서는 한미동맹의 이완을 촉발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문제에 접근하는 한미 양측의 태도와 접근방식이 과거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먼저, 국내보도(5.19)가 있었던 다음날(5.20) 환경부는 캠프 캐럴의 주변을 답사했고, 국방부는 정책실장을 단장으로 하는 태스크포스팀를 구성했으며, 국무총리실은 관계부처 대책회의를 개최하고 국무차장을 팀장으로 하는 태스크포스팀을 구성했다. 5월 21일에는 국방부·환경부·미군 관계자들이 현장을 답사했고, 한미 양측(국방정책실장/미8군사령관)은 한미 공동조사를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미국 측은 5월 23일 지역주민대표, 환경단체 대표, 민간전문가, 정부 관계자 등으로 구성된 민관합동조사단(35명)에게 캠프 캐럴 기지의 내부를 전례 없이 공개하고 특정물질의 매몰 기록을 확인하는 자료를 가감 없이 배포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울러 주한미군사령부는 관계자를 미 본토로 급파해 관련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고 한다.
이 문제는 우리 정부와 주한미군 측의 전향적 대응으로 비교적 안정적으로 관리되고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아직도 사안의 본질(고엽제 매몰 여부)에서 벗어난 문제와 의혹을 제기하고 있어 자칫 반미(反美)로 이어질까 우려된다. 물론 현재까지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지난 1일 ‘캠프 캐럴에 묻었던 화학물질과 오염된 토양을 해외로 반출했다’는 언론보도가 있긴 하지만, 아직도 어디로 나갔는지는 미지수로 남아 있다. 그런 만큼 우리 정부와 미군 측은 특히 고엽제의 독성이 지역주민의 건강과 직결돼 있음을 감안해 ‘아직도 고엽제 드럼통이 묻혀 있을 수 있다’는 가정하에 진상이 명백히 밝혀질 때까지 철저한 조사를 이행하는 한편, 각종 의혹이 정치 쟁점화해 반미로 이어지지 않도록 사안을 철저하게 관리하고 국민과의 전략적 소통을 활성화해야 할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한미 양측은 고엽제 드럼통이 발견될 것이라는 전제하에 앞으로 처리 및 오염치유 방법과 비용부담 등에 관한 대책을 세우고, SOFA 관련규정의 발전방안도 긴밀히 협의해 나갈 필요가 있다.
전례에 비춰 보면 환경관련 SOFA 규정상 상충(相衝)되는 부분이 있어 문제 해결의 걸림돌이 된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SOFA 합의의사록에는 ‘미국은 한국의 환경관련 법령과 기준을 존중한다(respect)’고 명시해 놓고, 특별양해각서에는 ‘미국은 KISE에 해당하는 오염만 치유하는 것’으로 규정돼 있다. 그 결과 한미 양측은 문제발생 때 동상이몽(同床異夢)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놓고 있다. 이번 기회에 관련 개념과 기준, 책임분담 원칙과 치유방법 등을 명확하게 재정립해 두는 것이 앞으로 유사한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것이다.
결국, 이번 고엽제 문제를 계기로 환경관련 잠재적인 현안까지 해결된다면 한미동맹은 더 건강하고 성숙한 방향으로 진화·발전할 것이다.
/공감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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