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영화 스타에서 100억원대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주역으로 떠오른 신예 이제훈(27) 준수한 외모에 178㎝의 훤칠한 키 그리고 탄탄한 근육질 몸매의 그를 두고 사람들은 ‘베스트’(베이비 페이스 + 비스트 몸매)남으로 꼽는다.
한 마디로 로맨스나 멜로물에서 선호할 법한 배우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한 번도 기회가 찾아오지 않았다. 2009년 영화 ‘친구사이?’(감독 김조광수)에 동성애자로 나와 남자와 사랑을 나눴다. 지난해 영화 ‘파수꾼’(감독 윤성현)에서는 고교생으로 분해 남자들과 부대꼈다.
이번 영화 ‘고지전’(감독 장훈)은 더하다. 6.25동란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홍일점 김옥빈을 제외하고는 주연배우에서 엑스트라까지, 국군부터 인민군까지 남자 일색인 탓이다. 물론 지난해 로맨틱 코미디 ‘김종욱 찾기’에서는 임수정의 직장 후배로 나오긴 했다. 그러나 러브라인은 그의 몫이 아니었다.
이제훈은 “그러고 보니 저는 연극이나 뮤지컬을 할 때도 러브라인이 없었네요”라고 되돌아 보면서 “다음에는 꼭 로맨스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요”라며 웃었다. 하지만 바로 이어 털어놓은 속마음은 달랐다. “사실 아직 못해본 게 많아서인지 많은 장르에서 다양한 연기를 해보고 싶어요. 많은 작품 속에서 나의 새로운 모습, 나도 모르는 내 모습을 찾을 수 있다면 만족합니다.”
이제훈의 연기 목마름은 짧지만 굵은 필모그래피를 거슬러 올라가 본다면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고교 3학년 때 연극영화과 진학을 꿈꿨지만 부모의 반대로 생명공학도를 선택했던 이제훈은 대학 2학년 때 중대 결심을 하게 된다. 휴학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연기를 하고 싶었지만 막연히 관심만 갖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반대에 부딪치자 공대를 간 것이구요. 그런데 스물두살때 마음을 다시 먹었어요. 정말 좋아하는 걸 해보자구요.”
막상 결심했지만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아는 사람 중에는 연기하는 사람은 커녕 예술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도 없었죠. 무작정 연기 학원에 등록해서 연기를 배웠어요. 그 뒤 극단에 들어가서 무대에도 서 보고, 오디션 봐서 뮤지컬도 해보고요.”
연극을 통해 내공을 쌓아가던 이제훈은 우연히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생들과 인연을 맺게 된다. “한예종 학생들이 만드는 단편영화 여러 편에 출연하면서 학교를 왕래하게 됐어요. 그러다 문득 이 학교에 다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래서 다른 학교는 돌아보지도 않고 다시 수능을 봐서 한예종 연극과에 응시했어요. 그런데 정말 운 좋게 합격을 했던 거죠.” 그때가 2008년이었다.
이제훈은 ‘고지전’에서 스무살 어린 나이에 대위가 돼 악어 중대장을 맡게 된 ‘신일영’을 연기한다. 3개월에 걸친 3차례의 오디션 끝에 외모는 어리지만 연기력은 뛰어난 배우를 찾던 장훈 감독의 선택을 받았다. 휴전협상 시작된 1953년부터 2년간 최전방 애록고지에서 벌어진 남북 병사들의 치열한 전투와 그 속에서 피어나는 인간애를 그린 이 영화는 지난해 ‘의형제’로 550만명 흥행신화를 쓴 장 감독,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의 박상연 작가가 의기투합해 기대를 모으는 작품이다.
“시나리오를 받아 보면서 너무 재미있었어요. 장훈 감독님은 평소 존경하던 분이라 정말 꼭 하고 싶었죠. 오디션이라도 좋으니 부딪쳐 보고 싶더라구요.”
그처럼 꿈에 그리던 장 감독의 작품이니 수없이 구르고, 몸 곳곳이 찢기고 다쳐도, 새우잠을 자도 마냥 즐겁고 행복했다. 특히, 신일영이 쏟아지는 포탄 사이를 뚫고 고지를 향해 홀로 달려가는 신을 찍을 때는 잘해야겠다는 다짐 뿐이었다.
“포탄이 터지는 곳을 깃발로 표시해놓고 리허설을 했지만 촬영할 때는 빼놓고 찍게 돼 위험천만일 수도 있었어요. 그런데 이번에 실패하면 다음날 다시 찍어야 해서 제 마음 속에는 안전보다 잘해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어요. 감독님, 선배 배우들, 스태프들 모두가 저를 주목하는 속에서 과감하게 자신감을 갖고 달렸어요. 그리고 성공했죠. 해냈다는 기쁨보다 촬영에 지장을 주지 않았다는 생각에 다행스럽더군요.”
뒤늦게 풀어놓기 시작한 연기 열정이어서인지 그 온도는 잴 수 없을 정도로 뜨겁다. “제가 본받고 싶은 배우는 독립영화, 상업영화 가리지 않고 넘나드는 분들이에요. 그런 분들이 작품을 하는 것을 보면 누구나 궁금해 합니다. ‘이번에는 이런 작품을 했는데, 다음에는 뭘 할까?’하고 궁금해지죠. 배우에게 그보다 큰 찬사는 없을 겁니다. 어쩌면 그 분들한테는 그 어떤 멋진 로맨스의 주인공도 지나는 과정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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