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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식 문화평론가) “저의 소원은 하나 뿐, 이 노예놈의 소원은 도방 창간에 있는 월아라는 여종을 수법 스님이 계신 곳으로 보내달라는 것입니다.”
이는 드라마 <무신>에서 죽음의 경기 격구(擊毬)에서 살아남은 김준이 한 가지 소원을 말한 내용이다. 격구를 주최하는 도방에서는 격구에서 우승한 자에게는 한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고 했었다.
월아는 도방창간에 일하고 있었는데 그 창간은 이른바 국가의 부엌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수십 명의 여성들이 하루 종일 음식조리에 정신이 없다. 이는 김준의 마음을 힘들게 했고 월아를 힘든 창간에서 빼내려 죽음의 경연장인 격구대회에 나갔던 것이다. 그런데 과연 도방 창간에는 드라마에서처럼 여성들만이 일했던 것일까?
드라마 <대장금>은 궁중의 수라간을 전면에 부각시키면서 크게 인기를 모았다. 이후 이병훈 피디는 공간스토리텔링에 한동안 집중하는데 궁중회화를 담당하는 도화서나 궁중음악을 관장하는 장악원과 같은 기구가 대표적이다.
물론 요리를 하던 수라간 나인이나 상궁들의 요리스토리텔링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나인과 상궁들은 여자들이다. 하지만 이 드라마에는 치명적인 오류가 있었다.
수라간 배경의 스토리는 한중일 학자들 간에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한-중-일을 통 털어 수라간에 이렇게 여성들만 일색인 경우는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르면 수라간에 있던 남녀의 비율은 14.2 대 1로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세종 시기 수라간의 출입 대전노비 388명 가운데 12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남성들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적은 수의 여성들은 요리를 관장하는 책임자들이었던 것인가. 그네들이 하는 일은 만들어진 밥상을 차리거나 밥상을 나르고 음식을 따뜻하게 하는 일 등 가벼운 일들을 많이 했다고 한다.
1605년 선조의 연회를 담은 ‘선묘조제재경수연도’(宣廟朝諸宰慶壽宴圖)에 등장하는 요리사들도 모두 남자들이다.
이렇게 수라간에 남성들이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일단 요리가 매우 중노동의 영역에 있다는 것이다. 궁중의 경우에도 많은 이들의 밥상을 한꺼번에 차려야 하기 때문에 물리적 노동의 양은 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왕의 경우 하루에 무려 다섯 번의 수라를 들었다. 그 음식의 종류가 질이 간단한 서민음식과 다름은 당연하다. 이를 위해 수백 명의 남자가 이런 요리에 달라붙어 있어야 했고, 일이 힘들어 기피하기도 했다.
현대에도 고급 호텔이나 규모가 큰 식당인 경우에는 셰프가 남성들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물론 이런 노동 강도만이 강조되는 것은 아니다. 유교국가인 조선에서는 요리도 국가의 공식적인 업무이자 행사이었기 때문에 여성을 배제했다는 지적도 있기는 하다. 도화서의 경우에도 여성들은 배제했다.
이 때문에 드라마 <바람의 화원>이나 영화 <미인도>에서 남장을 한 여성 화가 신윤복을 그려낼 수 있었다. 청와대 요리사라는 책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현대에도 궁중의 요리사는 남자인 셈이다.
왕실의 요리사가 남자인 이유를 설명할 때, 제정일치시대에 신에 대한 제사를 남자들이 주관하면서 남성들이 요리도 관장했다는 주장도 있다. 청와대의 남자 요리사는 제정일치시대의 유산일까.
드라마 <대장금>은 어린 장금이의 감동적인 성공신화로 이름을 높였지만, 문화사에서 치명적인 오류를 일반화시켰다. 특히 여성은 요리라는 인식을 갖게 했다. 무엇보다 조선시대에도 공식적인 정부조직에서 이분법적인 성별논리를 적용했다고 인식시키게 했던 것이다.
그러한 인식은 앞으로 상당기간 궁중의 요리는 여성이 담당했던 것으로 여기게 할 것이고, 악순환의 반복이 이루어질 것이다.
퓨전사극이 많아지는 상황에서 고증의 중요성은 단지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적 철학과 사상에 맞닿아 있기 때문에 더욱 간과할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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