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광동성서침례교회 김우생 목사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생각할 때 예수님은 마음이 온유하고 유순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사랑하는 목자로 어린이들을 보고 미소 짓고 병든 자를 고치시며 굶주린 자를 먹이시며 이 세상이 아니라 한 나라에 대하여 조용히 말씀하시는 분으로 여기며, 그곳에서 안도합니다.
그 이상 더 나가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상상할 수 없는 고통, 불의한 사람들의 손으로 극에 달한 가공할 죽음의 순간, 저주하고 잔인하며 처참하게 그를 죽인 사람들의 사악한 행위를 생각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53:3에서 성경은 예수님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 “슬픔의 사람 그리고 불행한 일(고통)에 익숙하여 잘 아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성서에는 구주를 사모하는 의미에서 찬송할 때나 기도할 때 우리가 우리 입술로 자주 부르는 이름들이 있습니다. “평강의 왕” “만군의 여호와” “선한 목자” “크신 의원” “새벽 별” “유다의 사자” “하나님의 어린양” 등 그의 이름들입니다.
그러나 “간고를 많이 겪은 사람” “슬픔의 사람”-예수님의 그 이름은 우리가 잘 부르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에게 “가혹한 시련의 고통”이 있을 때 드디어 그 이름을 생각합니다. 상처를 주는 세상에서 사나운 강타로 산산조각이 되었을 때 그 때 주님이 우리의 필요의 모든 것임을 발견합니다.
성령께서 이사야를 감동하시어 8세기가 지난 후에 일어날 일을 소상하게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야입니다. 여러분의 고통과 나의 고통을 그 누구보다 더 잘 이해하실 그분 “슬픔의 사람”입니다.
메시야는 ‘대가 약한 사람’ ‘변변치 못한 남자’였는가? 아닙니다.
그는 고난을 견딘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인간의 고통과 고난의 깊이를 이해하십니다. 이사야가 예수님에 대해 묘사한 단어들을 보십시오! 멸시 질고 슬픔 간고 상함 곤욕 괴로움 형벌을 받음 찔림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같았다.
우리가 생각하고 싶지 않은 단어들입니다. 메시야는 이기는 분이며 지는 분으로 생각하고 십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흰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오시는 분으로 보고 싶습니다. 그분은 정복하고 승리하는 분으로 보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예언하지 않았습니다.
신약의 히브리서기자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할 때 고난을 주제로 말했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히5:7)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 신성이신 그가 또한 온전한 인간으로 “임박한 죽음의 쏘는 것”을 앞에 두고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에게 위로와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잠시 읽은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 모두가 다 고통과 연관된 말씀입니다.
고통- 두 글자이지만 우리가 피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길을 고의적으로 피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고통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견디었습니다. 또한 포옹하였습니다.
그는 슬픔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우리의 깊은 상처와 갈등을 이해하고 동일시하십니다. 여러분이 고통 중에 있을 때 여러분을 만나 줄 이를 찾는다면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그 사람 “슬픔의 사람”을 만나십시오!
여러분과 나는 소리 내어 울면서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새로 태어난 아이가 양호하고 건강한 아이의 첫 번째 표시 중의 하나가 찢어지게 우는 울음소리라고 합니다. 작은 아이가 따듯한 어머니의 태 안을 떠나 냉랭하고 잔인한 고통의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우리가 태어난 순간부터 마지막 숨을 쉬는 순간까지 고통은 우리가 버리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는 동반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은 여전히 우리에게 유익을 가져다줍니다.
“마음이 상했다고 말하기보다 이가 아리다” 고 말하기가 훨씬 쉽다고 합니다. 통증이 있으면 누구에게 갑니까? 치과의사를 찾아갑니다. 그러면 우리는 마음의 상처가 있을 때 누구에게 갑니까? 그 대답은 어렵지 않습니다.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 우리의 고통을 이해하고 우리의 상한 마음을 이해하는 슬픔의 사람 예수께 가야 합니다. 고통과 아픔은 주님께 돌아오게 합니다. 우리의 성장과 영적인 복지를 이루게 하는 본질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멸시를 당하고 버림을 받고 부서지게 하는 고난을 느끼고 있다면 예수님께 오십시오! 그가 이해하십니다. (히4:15)
예수님과 제자들은 마지막 만찬을 마치고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갔습니다.(마26:30) 이때가 주님께는 가장 감성적인 때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겪으실 고난과 두고 가야하는 그들을 생각하며 ... 많은 개월 동안 그들과 함께 하였으나 그들은 앞으로 전개될 일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앞으로 십자가에 이르게 될 그때를 알고 있으셨습니다. 그의 가장 가까운 친구들로부터 열렬한 후원이 필요한 때가 바로 이때였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독한 때였습니다. (마26:36~38) 참조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을 비참하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3년 동안 멘토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가장 필요로 할 때 그들은 졸고 있었습니다. 깊은 관심이 없었습니다. 우정의 실패와 그를 파는 배신의 키스를 느끼실 수 있었습니다. 고통의 어려운 일을 겪을 때 가장 외로운 때를 지나게 됩니다. 가장 가까운 친구가 넘어지게 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돌아섭니다.
그분은 나의 겟세마네에서 나를 만나 주셨습니다. 앞으로 계속 만나 주실 것입니다.
“아는 것이 자동으로 감정을 고치지 못합니다.” 사람의 감정을 억지로 고치려고 하지 마십시오. 가장 좋은 것은 계속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가까이 머물면서 침묵하십시오. 그에게 유용한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고 후원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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