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의 고비마다 미 해병대가 있었다

    칼럼 / 이상돈 / 2012-08-12 14: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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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돈 중앙대 교수

    (이상돈 중앙대 교수) 우리는 한국전쟁 당시 위기에 처했던 대한민국을 구한 ‘영웅’으로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을 뽑는다. 한국전쟁을 직접 체험했던 세대나 그 세대로부터 전쟁을 전해들은 세대에게 가장 친숙한 이야기는 대략 이런 것이다.

    “트루먼 행정부의 미군 철수와 애치슨 국무장관의 경솔한 발언 때문에 소련과 김일성이 남침을 강행해서 대한민국이 지도에서 없어 질 뻔했는데, 맥아더 장군의 탁월한 전략 때문에 전세(戰勢)를 되돌려서 오히려 통일을 이룰 기회를 맞았다가 중공군이 남침을 해서 다시 후퇴하게 되었고, 트루먼 대통령이 맥아더 장군을 파면해서 우리나라는 다시 분단국가가 되고 말았다.”

    말하자면 맥아더는 대한민국의 수호신이고, 트루먼은 통일을 방해한 훼방꾼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먼 이야기이다. 우리에게 알려진 맥아더는 과장되고 미화된 측면이 많다. 이제는 과대포장된 ‘맥아더 신화(神話)’를 벗겨낼 필요가 있다.

    전쟁 역사가들은 1950년 6월에서 1951년 봄까지의 한국전쟁처럼 전선(戰線)이 급속하게 움직인 경우가 없었다고 말한다. 초기에 한국군은 너무 쉽게 무너졌고, 인천상륙작전 후에는 북한군이 쉽게 무너졌고, 중공군 개입 이후에는 미군이 또 다시 쉽게 무너졌다는 것이다.

    북한군의 남침에 대비하지 못한 주된 책임은 이승만 정권에 있지만, 트루먼 행정부도 그에 못지않은 책임이 있다. 소련의 속셈을 알지 못하고 미군을 철수시켰고, 애치슨 국무장관은 경솔한 발언으로 북한과 소련에 잘못된 메시지를 주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툭하면 “북진통일을 하겠다”고 큰 소리를 쳤고, 이런 말을 곧이들은 주한 미국 대사관은 “한국군의 북침이 우려된다”는 보고를 본국에 보내서 상황을 오판하게 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양면전쟁을 벌였던 막강한 미군이 한국전쟁 초기에 그토록 속수무책이었던 데에 대해서도 놀라지 않을 수 없는데,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다음 전쟁은 핵전쟁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미국의 정책담당자들은 재래식 전력을 구(舊)시대의 유물로 보았다. 1차 대전 때 포병장교로 참전했던 트루먼은 고위장성들에 대해 좋지 않은 선입견을 갖고 있었다.

    트루먼은 1948년 대선에서 자신을 지지했던 루이 존슨을 국방장관으로 임명했는데, 그는 감군(減軍)을 제1의 국방정책으로 밀어 붙였다.

    한편 맥아더는 도쿄의 사령부에서 일본의 통치자로 군림하고 있었고, 주일 미군은 점령군 행세를 하면서 일본 기생들과 어울리면서 좋은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맥아더 휘하의 8군 사령관으로 새로 부임한 월튼 워커 중장은 그런 8군을 보고 한심스러워 했다. 맥아더의 주변을 싸고 있는 참모장 네드 앨먼드 소장과 정보참모 윌로비 소장은 워커를 소외시켰다.

    2차 대전 당시 과달카날, 이오지마 등 태평양 도서(島嶼)에서 일본군과 사투(死鬪)를 벌인 해병대는 상황이 더욱 나빴다. 해병대를 아예 해체할 것이라는 소문이 워싱턴 정가(政街)에 파다했고, 해병대 지휘부는 생존의 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이런 연유로 미군은 북한군 남침에 대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맥아더가 급히 파견한 스미스 기동부대는 큰 피해를 입고 패퇴했고, 24사단은 사단장 딘 소장이 포로로 잡히는 수모를 당했다.

    한국군과 미군은 전투도 변변히 해보지 못하고 낙동강까지 밀렸는데, 이런 상황에서 낙동강 전선을 지킨 부대는 미 해병대였다. 해병대 폐지론에 시달리던 당시 해병대 사령부는 한국전쟁이 자신들의 존재가치를 확인시켜 줄 기회로 생각했다.

    제2차 대전 당시 주로 유럽에서 싸웠던 육군과 달리 태평양에서 일본군과 싸운 해병대는 아시아에서의 전쟁에 친숙해 있었다.

    해병대도 전력이 축소되어 있었으나 특유의 ‘해병 문화’ 덕분에 단기간에 예비역을 소집할 수 있었다. 해병 1사단 5연대와 해병 항공대로 구성된 6,500명 규모의 해병 1여단은 8월 1일에 부산에 상륙했다.

    여단장 에드워드 크레이그 준장이 지휘하는 해병 1여단은 진동리, 고성, 장촌리, 밀양 등지에서 눈부신 활약을 해서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냈다. 호위항모에서 발진한 해병 항공단 소속 코르세어기(機)는 지상의 해병부대를 위한 근접지원공격을 과감하게 전개해서 미 육군 지휘관들을 놀라게 했다.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올리버 스미스 소장이 지휘하는 해병 1사단 본대가 도착하자 해병여단은 사단에 합류했다. 맥아더는 합참을 무시하고 인천상륙작전을 밀어 붙였다.

    해군과 해병 지휘관들은 인천상륙작전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일단 결정되자 이를 성공시키기 위한 작전계획을 짰다.

    제2차 대전 중 태평양에서 상륙작전 경험이 풍부한 제임스 도일 해군 중장과 펠리우 섬 등에서 상륙작전을 지휘했던 스미스 해병 소장이 있었기에 해병은 불리한 조건을 극복하고 인천에 상륙할 수 있었다.

    맥아더는 상륙작전 사령관으로 자신이 총애하는 네드 앨먼드 소장을 임명했다. 그 소식이 전해지자 콜린스 육군참모총장이 “뭐라고!”하면서 벌떡 일어났다는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2차 대전 당시 유럽에서 사단병력을 잃어버린 전력(前歷)이 있는 네드 앨먼드는 가장 무능한 육군 장성으로 알려져 있었다. 해군과 해병대 지휘관들은 이러한 맥아더의 조치에 경악했다.

    맥아더는 도쿄의 호텔에 편안하게 살면서 전쟁을 지휘했고, 앨먼드 소장은 캠핑 밴을 가지고 다니면서 더운물로 샤워하고 좋은 음식을 차려 먹었다. 이런 소문을 전해들은 해병장병들은 육군 지휘부를 비웃었다.

    맥아더 사령부는 인천 상륙작전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데 더 많은 관심이 있었다. 맥아더는 해병 1사단에게 9월 25일까지 서울을 수복하라고 지시했다. 전쟁 발발 후 3개월 만에 서울을 수복했다고 홍보하기 위함이었다.

    해병대원들이 서울시내에서 시가전으로 피를 흘리고 있을 때 앨먼드 소장은 “적은 패퇴하고 있고 서울은 수복됐다”고 일방적으로 보도자료를 내서 기자들의 빈축을 샀다.

    서울을 탈환한 후에도 맥아더는 워커가 지휘하는 8군은 평양을 거쳐 북진하도록 하고 앨먼드가 지휘하는 10군단은 원산에 상륙해서 장진호 지역을 거쳐 압록강으로 진격하도록 명령했다.

    10군단에 편입된 해병 1사단은 또다시 무능한 앨먼드 소장의 지휘를 받게 된 것이다. 해병 지휘관들은 도무지 그들이 왜 험준한 산악지대를 뚫고 가야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압록강에 도달하는 것이 목표였던 맥아더 사령부는 중공군의 개입 가능성을 시사하는 정보를 무시해 버렸다. 8군이 평양을 넘어서 진격하자 국경에 배치되어 있던 중공군은 미군을 포위하여 공격하기 시작했고, 8군은 미군 역사상 유례가 없는 후퇴를 했다.

    장진호로 진격한 해병 1사단은 스미스 소장의 현명한 판단과 해병장병들의 용맹에 힘입어 혹한 속에서 10배나 많은 중공군을 패퇴시키고 흥남으로 철수할 수 있었다. 10군단에 속했던 미 육군과 한국군은 거의 전멸했으니 맥아더의 독선 때문에 큰 대가를 치른 셈이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미군이 다시 후퇴하게 되자 합참에서는 평양과 원산을 잇는 전선을 방어하는데 그쳤어야 했다는 등 후회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합참이 맥아더를 견제할 수 없었던 데는 이유가 있었다. 우선 인천상륙작전이 너무 성공적이어서 아무도 맥아더를 견제할 수 없었다.

    당시에 조셉 매카시 상원의원이 미 정부 내에 공산주의자들이 많다고 주장해서 파문이 일었고, 루이 존슨의 후임으로 국방장관이 된 조지 마셜은 중국 본토를 공산주의자에게 내어 주었다는 비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웨이크 섬에서 맥아더를 만나고 온 트루먼은 맥아더를 해임해야 하겠다고 결심하게 됐고, 결국 1951년 4월 11일에 맥아더는 파면되었다.

    맥아더가 일본을 떠날 때 수많은 일본인들이 길에 나와서 그를 환송했고, 뉴욕에선 그를 환영하는 군중대회가 열렸다.

    미 의회에서 맥아더는 “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져갈 뿐이다”라는 연설을 했고, 이를 전해들은 트루먼은 “미친 헛소리”라고 하면서 불쾌해 했다. 공화당은 트루먼 행정부를 상대로 한국전에 관한 청문회를 열었지만 청문회는 결국 한국전쟁의 실패에 맥아더가 책임이 있다는 결론을 확인시키고 말았다. 합참의장이던 오마 브래들리 장군은 “맥아더가 미국은 잘못된 때에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적과 싸우게 만들었다”고 증언했다.

    맥아더가 해임된 후 매튜 리지웨이 장군이 지휘하는 미군의 전략은 전쟁 발발 전의 상태로 회복하는 것이었다. 미군과 한국군은 보다 방어하기에 좋은 강원도 북부를 차지하는데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희생을 치러야만 했다.

    한국전쟁 50-60주년에 즈음해서 미국에서 출간된 책을 보면 맥아더의 아집과 독선이 전쟁을 지연시켰다는 점을 공통으로 지적하고 있다.

    2000년에 나온 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의 스탠리 웨인로브 교수가 쓴 <맥아더의 전쟁>(MacArthur's War)도 그런 결론을 내리고 있다.

    웨인로브 교수는 한국전쟁 발발 후 1951년 4월까지 한국전쟁은 사실상 맥아더의 전쟁이었다면서, 인천상륙작전은 맥아더의 업적이지만 중공군의 참전가능성을 예견하지 못하는 등 맥아더의 정세판단에는 문제가 많았고, 독단적인 작전명령으로 장병들을 불필요한 위험 속에 빠뜨렸다면서 트루먼 대통령이 맥아더를 해임한 조치는 정당하다고 결론내렸다.

    1999년에 나온 마틴 러스의 <브레이크 아웃>(Breakout)은 맥아더의 무모한 명령으로 함경도 장진호 지역에 투입됐던 미 해병 1사단이 10배나 많은 중공군의 포위 공격을 뚫고 혹한과 싸우면서 흥남으로 철수한 장진호 전투를 리얼하게 그렸는데, 해병대원들이 맥아더 사령부와 앨먼드 소장을 얼마나 경멸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저명한 언론인 데이비드 핼버스탐이 2007년에 펴낸 <가장 추웠던 겨울>(The Coldest Winter)도 맥아더의 오만과 독선이 전쟁을 거의 망칠 뻔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핼버스탐은 맥아더와 그의 사령부, 그리고 맥아더의 충복이었던 네드 앨먼드 소장을 무능하고 무모한 집단으로 묘사했다.

    국내에 번역 출판된 ‘가장 추웠던 겨울’이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 것은 맥아더에 대한 그 같은 평가 때문인데, 사실 그것은 한국전쟁을 보는 미국 전쟁 역사가들의 보편적 시각이다.

    2009년에 출간된 빌 슬론의 <가장 어두웠던 여름>(The Darkest Winter)은 낙동강 전투와 인천상륙작전, 그리고 장진호 전투에 이르는 미 해병대의 활약을 그리고 있다.

    역시 2009년에 나온 <조국과 해병대를 위하여>(For Country and Corps)는 스미스 소장의 외손녀인 게일 쉬슬러가 펴낸 스미스 장군의 전기인데, 한국전쟁 당시의 해병대의 활약과 해병대 내부의 사정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한국전쟁에선 정규 한국군은 물론이고 학도병도 영웅적으로 전투를 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고비를 넘길 때마다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역시 미 해병대였다.

    그럼에도 한국전쟁에서의 미 해병대의 역할은 우리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반면 맥아더의 공적은 과장되어 알려져 있는데, 그것은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는 서로를 이용해서 워싱턴과 줄다리기를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돌이켜 보면 이승만과 맥아더는 공통점이 많았다. 두 사람 모두 유난히 에고(ego)가 강해서 자신에게 불리한 조언을 듣지 않았다. 당연히 그들의 주변에는 ‘예스맨’들이 맴돌았다.

    두 사람은 ‘북진통일’이란 불가능한 슬로건을 내걸어서 많은 한국인들을 설레게 만들었지만 애당초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오히려 그런 슬로건이 중국의 개입이란 불행을 초래한 측면이 있다.

    맥아더의 독선이 아니었다면 평양과 원산에 이르는 ‘반(半)통일’을 이루었을 것이고, 그러면 한반도의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다. ‘맥아더 신화’가 한국의 기성세대에 자리 잡게 된 데는 이승만 대통령의 역할이 컸다고 할 것이다.

    반면 해병 지휘관들은 오직 군인으로써 주어진 임무에 충실했다. 인천상륙작전과 서울수복 작전, 그리고 장진호 작전을 이끌었던 해병 1사단장 올리버 스미스 장군과 이에 앞서 해병 여단장으로 낙동강 전투를 성공적으로 지휘했던 에드워드 크레이그 장군은 보기 드문 군인이었다.

    해병 장병들은 이들을 따라가면 지옥에서도 빠져 나올 수 있다고 믿을 정도였다. 그들이 있었기에 낙동강 전선을 지킬 수 있었고, 장진호 전투에서 열 배나 많은 중공군을 궤멸시킬 수 있었다.

    스미스 장군과 크레이그 장군은 비슷한 말년을 보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타임지 표지인물로 등장하고 장진호 전투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스미스 장군이었지만 정작 해병대 사령부는 그에게 냉담했다.

    그는 1951년 4월에 1사단장직을 내놓고 귀국해서 캠프 펜들턴 기지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해병대 본부가 그를 견제하려는 분위기가 팽배하자, 스미스는 한국전쟁에 대해 일체 말을 하지 않았다.

    1953년에야 중장이 된 그는 1955년에 전역했고, 샌프란시스코 근교에서 은퇴생활을 했다. 스미스는 1977년 12월 25일 잠을 자다가 평화롭게 운명했는데 향년 84세였다.

    크레이그 장군은 1951년 1월말에 소장으로 진급되어 본국으로 발령이 났는데, 그것은 본인이 원치 않았던 바이었다. 한국전쟁 내내 앨먼드 장군의 견제와 장난에 시달린 그는 자신에 대한 인사발령도 그것이 작용한 것으로 생각하고 전역을 신청했다.

    주변에서는 말렸지만 끝내 전역한 그는 샌디에고에서 정착해서 은퇴생활을 했다. 크레이그도 한국전쟁에 관해서 전혀 말을 하지 않았고 말년을 조용하게 보냈다.

    그는 1994년 12월 잠을 자다가 세상을 떴는데, 그의 나이 94세였다.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고 무엇보다 부하들의 안위를 걱정했던 이들과 이들을 따랐던 미 해병장병들이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있었을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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