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칼럼] 망각의 시간, ‘오블리비언’

    기고 / 함혜숙 / 2013-04-17 20: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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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혜숙(영상 번역가)
    오블리비언(oblivion)의 사전적 의미는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 망각, 완전히 파괴돼 흔적 없이 사라짐’이다. 영화 <오블리비언>의 내용은 제목 그대로이다.
    인류는 외계인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지만 핵무기를 사용한 탓에 지구는 완전히 파괴되어 폐허로 변하고, 살아남은 인류는 토성의 위성인 타이탄으로 이주한다.
    2077년 지구에 남아 발전탑을 지키는 임무를 수행 중인 잭 하퍼(톰 크루즈)와 빅토리아(안드레아 라이즈보로)는 과거 기억이 삭제돼 본연의 모습을 망각한 채 살아간다. 그리고 본인들이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 제대로 의식하지 못한다.
    함께 임무를 수행하는 잭과 빅토리아는 얼핏 사랑하는 관계로 보이지만,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고 있어도 사실상 등을 맞대고 있는 듯하다. 빅토리아는 2주만 지나면 임무를 마치고 타이탄으로 돌아갈 생각에 한껏 부풀어 있다.
    반면, 잭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지구를 여전히 집으로 생각하며 애착을 느낀다.
    빅토리아가 미래 지향적이라면, 잭은 과거 지향적이라고 할까. 빅토리아는 과거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지만, 잭은 삭제된 기억에 대해 자꾸만 호기심을 느낀다.
    특히 계속 꿈속에 나타나는 의문의 여인이 기억에 남아 있는 실제 인물인지 아닌지 몰라서 혼란스러워한다. 그러던 중, 그 여인을 실제로 만나게 되면서 잭은 자신을 둘러싼 거대한 비밀에 대해 서서히 알게 된다.
    이 영화의 설정이나 줄거리는 새롭지 않다.
    외계인과의 전쟁으로 폐허가 된 미래 지구도 그다지 낯설지 않고. 기억을 삭제하고 조작한다는 설정도 다른 SF 영화에서 익히 봤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오블리비언>의 인물들은 자신의 기억이 삭제된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는 정도? 120분이 넘는 러닝타임과 SF 블록버스터라는 타이틀을 생각하면, 다소 액션이 심심하게 느껴진다.
    <미션 임파서블: 고스트 프로토콜>이나 <트랜스포머> 같은 대규모 액션을 기대하면 실망할 수도 있다. 초반에는 주요 인물이라고 해 봤자 잭과 빅토리아 둘밖에 등장하지 않아서 적막함이 오래 이어진다.
    그래도 폐허가 된 미래 지구를 재현한 시각적 표현은 뛰어나다. 그리고 잭 하퍼를 연기한 톰 크루즈는 여백으로 이뤄진 허허벌판에서도 스크린을 꽉 채우는 액션과 연기를 보여 준다.
    영화 외적인 얘기는 이만 줄이고, 오블리비언(oblivion)이라는 말로 다시 돌아가 보자. 빅토리아는 망각의 시간 속에 살면서 현재에 대해 만족해한다.
    하지만 잭은 끊임없이 현재에 의문을 품고, 과거에 집착한다.
    현재의 불합리한 상황을 모른 채 행복해하는 빅토리아의 삶. 보장된 미래는 팽개치고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려고 애쓰는 잭의 삶. 어느 것이 나을까? 우리는 ‘망각’ 덕분에 고통스러운 과거도 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과거를 돌아보기보다는 미래를 향해 가열차게 달려가는 게 현대 삶의 미덕이기도 하다. 하지만 과거에는 우리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과 추억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우리는 소중한 누군가를 기억하려고 애쓰고, 누군가한테 잊혀지는 걸 슬퍼한다.
    조셉 코신스키 감독은 깊은 철학적 질문을 제기하는 대서사적인 SF 블록버스터를 만들려고 했겠지만, 나한테는 소중한 사람과 기억을 지키려는 한 남자의 러브스토리가 담긴 소소한 드라마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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