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 에세이 ‘역사가 지식이다’를 탈고하면서 더 써야 할 사단이 없음을 자각하게 되었다. 평생을 글을 쓰면서 살아왔고, 더구나 방송드라마와 같은 끝없이 긴 글을 40여 년 동안이나 썼으며, 또 그와 다른 역사소설이나 역사에세이와 같은 글로 책을 엮은 것이 100여 권을 넘는 지경이면 나의 글쓰기는 일반적인 의미와 다른 마치 노동이나 전쟁과도 같은 소용돌이를 거쳐 온 것이나 다름이 없다. 비록 평생에 걸친 업보라 하여도 글을 쓴다는 개념보다는 의무적으로 원고지의 칸을 메웠다는 말이 더 절절할 수도 있는 각별한 경험이었다 해도 망발이 아니다.
대하소설로 완성한 '조선왕조500년(금성출판사간)' 48권을 비롯한 조선사의 그루터기와 같은 에세이 류를 합치면 정확히 계산해 본 것은 아니만 200자 원고지로 얼추 20여만장은 되지 않을까 싶지만, 그것이 모두 <조선사(朝鮮史)>에 관련된 내용이라면 정말이지 이젠 더 쓰고 싶어도 쓸 거리가 없고, 또 억지로라도 쓴다면 아무리 새롭게 쓰고자 해도 리메이크나 재탕(再湯)일 될 것은 자명한 이치라, 아예 그 근처를 얼씬 거리는 것도 삼가고 있는 요즘이다.
간혹 가까운 분들은 <고려사>에 도전해 보라고 권하기도 한다. 말이 쉬워 <고려사>지, 그때의 이야기를 줄줄 꿰게 되자면 또 얼추 20여년의 세월이 필요하다는 것은 이미 한 경험만으로도 입증이 되고도 남을 일이라면, 만용이 아니고는 불가항력이다.
내가 조선의 정사(正史)에 몰입한 것은 보다 정확한 드라마(조선왕조 500년)를 쓰기 위한 방편이었을 뿐, 학문을 위해 사료를 살핀 일은 추호도 없다. 더구나 드라마를 위한 <역사탐구>는 년도(年度)로 읽는 것이 아니라 행간(行間)을 읽어야 한다는 사실은 인지한 것이 내 역사문학의 발판이자 실체가 되었다는 사실은 큰 자랑이고도 남는다.
그런 탓으로 현실의 여러 정치적 현상을 살피노라면 자연스럽게 조선시대와 비교하게 되고 그 개선책 또한 조선의 시대의 역사에서 찾게 된다.
근자 엉망으로 뒤엉킨 NLL의 사초(史草)가 실종된 사건을 해결하려는 국회의원이나 정치인들의 언동을 보면 한심하다 못해 참담하다는 생각이 든다. 제나라의 역사도 모르면서 현실의 사단에 대처하는 것은 이미 정치의 수준이랄 수가 없다. 우리의 자랑이자 세계의 자랑인 ‘조선왕조실록’에는 사초를 외부로 반출하면 참수(斬首ㆍ목을 치는 일)로 다스려야 한다는 엄한 벌칙이 있다. 이같은 엄연한 역사기록을 중히 여긴다면 전직 대통령이나 청와대가 관련되었다는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났으면 해당자를 잡아서 극형에 처하면 간단하게 될 일을, 한나라당(새누리당)과 민주당이 합의하여 묻어버리자는 논란이 있는 것은 무엇이 옳고 그른 것조차도 판단하지 못하는 무지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그런 무지를 근간으로 다스려지는 작금의 대한민국의 정치현실은 온전 하다기 보다 비극을 넘어서는 참담함의 연속이라 하여도 할 말이 없을 지경이다.
벌써 여러 차례 소개한 명언이지만 세종대왕의 역사인식은 오늘의 정치인들이나 지도급 인사들에게 명심해야할 경구이고도 남는다.
대저 정치를 잘하자면 지난 시대의 치란(治亂)의 자취를 살펴야 하고, 지난 시대의 치란의 자취를 살피기 위해서는 역사를 상고하는 길이 최선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퇴임 후, <e知園>이라는 컴퓨터 시스템에 국가문서를 담아서 사가(私家)로 반출하였다가 여론의 호된 뭇매를 맞고 반환한 전력이 있는데, 이제 또다시 그에 의해 사초가 훼손되었다면 이 나라 대통령이나 정부는 고사하고 지식인 사회의 역사인식이 어느 정도의 수준임을 극명하게 보여준 꼴이다.
이런 치사한 나라의 국민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 너무도 참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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