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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 중 이맘때면 아침에 일어나서 이메일 박스를 열어보기 심히 두렵다. 고릿적에 마감을 넘긴 번역 원고를 정중하게 독촉하는 편집자의 메일이 보일까봐 무서워서가 아니다(물론 그것도 무섭다!). 그렇다고 이미 일정 꼬인 와중에 교정지를 보내겠다는 또 다른 편집자의 메일이 왔을까봐 무서운 것도 아니다(이건 더 무섭다!). 매달 어김없이 날아오는 각종 고지서와 신용카드 대금 명세서들이 무서운 것도 아니다(위험이 항구적으로 굳어지면 그에 대한 공포도 만성화된다). 내가 요즘 제일 두려워하는 메일은 그것보다 한 단계 더 격상된 적색 등급 즉 소득공제용이라는 제목을 달고 내 메일함에 꽂히는 1년치 신용카드사용 내역서이다. 그것도 한 장이 아니라 각종 카드사별로 왠갖 잡새처럼 날아드는 우편 폭탄들.
그렇게 온 내역서들을 보며 나는 매년 토씨 하나 바뀌지 않은 똑같은 대사로 절규한다. “아니,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정말이지 이렇게 말하는 나도 지겹다. 어떻게 나란 인간은 이렇게 일관적일 수 있는지. 이렇게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쓰면서 여태까지 파산 선고도 하지 않고 살아올 수 있었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이 정도면 쇼핑 중독자를 위한 갱생원이나 재활 치료원이 있다면 자발적으로 입원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러나 그런 와중에 그동안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가계부를 한 번 훑어보면 조금 억울하기도 하다. 된장녀라고 지탄받을 만큼 엄청난 명품 백 한 번 사본 적 없고, 헐벗고 다닐 순 없으니 철따라 옷 몇 벌 장만하고, 돈에 자식의 미래를 저당 잡힐 수는 없으니 남들 다 보내는 학원 몇 개 보내고, 일하다 보면 밥 짓는 때를 놓쳐 배달의 민족답게 배달 음식도 애용하고, 우물 속에 혼자 사는 개구리도 아니니 누가 커피 한 잔 사면 나도 밥 한 끼 사는 관계들을 유지하고. 이렇게 ‘필요’에 따른 소비만 해왔는데 왜 이런 무시무시한 숫자가 찍힌 것일까.
그러다 <굿바이 쇼핑>이란 책을 알게 됐다. 전에도 말했지만 책을 선택하는 내 기준은 지극히 충동적이고 우발적. 그래서 순간적으로 이 책을 사야겠다는 충동이 일었고 작가 역시 크리스마스 쇼핑해서 바리바리 들고 오던 쇼핑 봉지들을 땅바닥에 떨어뜨리다 치민 울화에 1년 동안 생필품을 제외한 쇼핑은 절대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실천에 옮긴 실화라는 책 소개에 곧바로 인터넷 서점의 구매 버튼을 눌러버렸다. 자, 이제 <굿바이 쇼핑>을 구매했으니 380페이지(쇼핑을 안 하기 위해 읽어야 하는 분량치고 좀 길지만)만 읽으면 이 주체 못하는 소비 욕구를 다스릴 수 있단 말이지. 나도 이제 신용카드와 작별할 날이 멀지 않았다는 비장한 각오로 첫 장을 펼쳤다.
그리고 첫 장부터 이 위트 넘치는 작가에게 반해버리고 말았다. ‘9.11 사태 이래 우리의 소비자 최고사령관께서는 용기를 잃지 말고 당당하게 지갑을 열어달라고 국민들에게 당부해왔다’는 그녀의 말에 어찌 웃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발랄하면서도 폐부를 찌르는 유머로 서두를 연 작가는 도저히 간과할 수 없는 전 지구적 위기에 달한 소비 문제를 연구해보기 위해 ‘1년 동안 소비하지 않는 삶’에 뛰어든다. 그러나 프로젝트 개시일인 1월 1일 며칠 전부터 작가와 그녀의 동반자는 필요한 물건 몇 가지와 전에 눈여겨 두었던 물건들을 다급히 사면서 전율과 쾌감 그리고 불안을 느낀다. 앞으로 닥쳐올, 소비하지 않을 기나긴 1년에 대한 무의식적인 공포가 찾아온 것이다.
자, 그렇게 ‘생필품’만 빼고 소비하지 않는 1월이 시작됐지만 과연 무엇이 생필품인가란 거대한 의문이 이 둘을 압도한다. 머리는 당연히 미장원에서 잘라야 하지만 머리카락을 꼿꼿이 세워야 하는 헤어젤은 생필품일까? 올리브나 와인은? 두루마리 휴지와 티슈가 생필품일까에 대한 고민은 나아가 그러면 나뭇잎을 쓰란 말인가, 라는 웃지 못 할 고민으로 깊어진다. 그런 고민을 토로하면서 작가는 소비 문제를 다룬 연구를 보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사는 물건은 필요해서 사는 것이고, 자신이 원하는 건 생필품이라고 느낀다’고 했다. 아... 그래서 내가 ‘생필품’만 사는데도 이렇게 아등바등 힘들게 일을 해야 했구나. 내 인생을 지배하는 의문 31가지 중 하나가 풀리는 순간이었다.
생필품에 대한 의문으로 시작된 1월은 영혼의 허기를 채우기 위한 쇼핑이 일상이 된 현대인에 대한 통찰력 있는 일화들이 줄을 잇는 2월로 넘어간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공감하는 건 스마트울 양말 에피소드. 그 신상을 사자마자 단지 전부터 신었다는 죄 하나만으로 자주색 폴리에스테르 양말이 꼴도 보기 싫은 존재로 전락했다는 그녀의 고백에 그야말로 천만번 공감했다. 옷장에 걸린 멀쩡한 겨울 코트 세 벌(작년 겨울에는 그렇게나 사랑스럽던 코트들)이 올 겨울엔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천덕꾸러기로 변해버린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됐다. 그런 악질적인 증상을 나만 앓는 게 아니라는 걸 느꼈을 때의 그 동지의식이란. 그러나 신상에 대한 애정은 프로이드의 이론을 빌리자면 페티시 수준의 애정, 그야말로 미치광이 애정이라고 작가는 냉정하게 진단한다. 어이쿠.
자, 존 스튜어트 밀 가라사대 인간은 부자가 되기를 바라진 않지만 남보다 잘살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이토록 넘쳐나는 물질의 시대에 우거지상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남보다 잘나고 싶은 욕망은 남보다 잘나 보이는 물건을 사야겠다는 욕망으로 카멜레온처럼 색깔을 바꾸며 우리 마음속에 똬리를 틀고 있다는 소리다. 그리고 타인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으며 존중 받기 위해 돈을 써야 하는 사회에서 소비는 의무이자 권리다. 이런 세상에서 쇼핑을 하지 않고 ‘자발적 가난’을 택해 살아가기의 지난함과 그에 따라오는 사회적, 철학적 문제들을 작가 주디스 러바인은 유머러스하면서도 냉철하게 기록한다.
쇼핑하지 않고, 따라서 무리하게 돈을 쓰지 않고 일하지 않음으로써 생기는 시간과 여유와 권태를 작가 부부는 공공재를 이용함으로써 메우고 결핍된 욕망을 충족시키려 노력한다. 그러면서 깨닫는다. 전에는 아무 생각 없이 돈으로 해결할 수 있던 욕망과 필요들을 공공재(공립학교, 국민주택, 대중교통, 국립병원, 국립공원, 박물관, 도서관, 국립대학 등등등)로 충족시키려 했을 때 거의 모든 공공재들이 민영화라는 미명 하에 형편없이 낙후되고 퇴락해가고 있는 현실을. 이제 그야말로 국가는 사라지고 시장이라는 괴물이 미국을 삼켜버린 괴기스런 상황을 읽으며 왜 이렇게 온 몸이 떨리는지 모르겠다. 바로 여기 내 앞에서 펼쳐지는 일이 미국에서는 몇 년 앞서갔다는 그런 깨달음이었을까?
작가는 1년 동안 실시한 ‘쇼핑 안 하기 프로젝트’의 결과로 일 년 열두 달 중 석 달은 일을 하지 않아도 버틸 수 있는 시간을 벌었고, 생활비를 줄였으며, 예전보다 덜 먹게 됐다. 그리고 물건을 구매할 때마다 그 구매가 세계의 자원과 사람들에게 미치게 될 잠정적인 영향을 생각하게 됐으며, 좀 더 의식 있는 소비자로서 ‘공공선(민주주의와 공공자산들을 지키는 가치)’을 추구해야 한다는 당위와 그 거대한 꿈이 이뤄질 수 있다는 믿음을 선물로 받게 됐다. 그리고 그 프로젝트를 실시한 1년 동안 배우자와 한 번도 돈 문제로 심각한 논의(싸움)를 하지 않게 됐다고 말했다.
솔직히 말해, 이 책 한 권 읽었다고 해서 당장 내일부터 마트 방문 횟수가 줄어든다거나 백화점의 세일 현장에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지 않으리라는 자신은 할 수 없다. 그리고 흥미로운 신간이나 블링블링한 신상을 돌처럼 보겠다는 맹세도 못 하겠다. 이 세상 일 나 혼자 다 하는 것처럼 오버하면서 그에 대한 보상으로 책상을 뒤덮은 각종 주전부리를 없애버리겠다는 건 너무 가혹한 형벌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돈이 된다면, 저렴하다면, 포인트 적립을 두 배로 해준다면, 이란 유혹에 속아 넘어가 맹목적으로 카드를 긁는 행위는 자제해야 할 것 같다. 무엇보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들에 눈이 멀어 내가 지켜내야 할 공공재들이 사라지는 비극을 보지 못하게 되는 일은 없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아주 좋은 책 <굿바이, 쇼핑>이었다.
이글의 원문은 네이버 카페 '더라인 통번역 오픈케어'의 [박산호의 책과의 연애](http://cafe.naver.com/thelineopencare/4192)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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