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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문 변호사 |
<비우티풀>은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의 교외 빈민가를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인 욱스발은 중년 남성이다. 그는 아프리카 세네갈인과 중국인들 같은 이민자들의 거주지역인 산타 콜로마에 살고 있는 사람이다. 그의 직업은 불법체류 중인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중계하는 브로커이고, 죽은 사람과 대화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인력회사에서 일자리를 알선해주고 힘든 사람들을 돌봐주는 착한 사람으로도 묘사된다. 아버지는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고, 창녀라 불리는 조울증 아내가 있다. 그리고 그 형은 아내와 불륜을 저지른다. 주인공 욱스발(하비에르 바르뎀 역)은 뭐 하나도 제대로 된 게 없는 생활을 살고 있다. 그런 그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바로 그의 아들과 딸이다. 욱스발은 아이들만 생각하며 죽기 살기로 살아간다. 그런 그에게 3개월의 시한부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최 후 통첩을 받게 된다. 시한부 인생이란 누구에게나 잔인한 것처럼, 그에게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그는 부인과 이혼하고, 혼자서 어린 딸과 아들을 성실하게 키우고 있다. 부인이 조울증과 마약과 섹스중독자이기에 아이들에게 교육상 좋지 않고, 늘 폭력적인 아내로 인하여 아이들과 함께 사는 것이 안좋다고 판단하여 이혼을 결정했고, 혼자서 아이들을 키운다.
그리고 그는 3개월의 시한부 생명을 살아야 한다는 암 선고를 받고 자신의 삶을 정리한다. 하지만 그에게는 비밀스럽게도 죽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능력이 있었지만, 정작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죽음을 준비하기에는 그의 현실이 녹녹하지만은 않다.
이 영화는 욱스발의 이러한 상황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형태로 비극적인 삶을 묘사하려고 하였다. 영화의 전개가 조금은 지루하고 단선적이다. 하지만 그의 삶의 태도는 차분하다.
그러나 영화의 진지함은 도처에서 도사려 있다. 욱스발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도 그러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를 준다.
감독은 같은 제작 노트에서 ‘유럽의 새로운 정치사회적 현실’을 말하며 모든 도시의 빈민가마다 형성된 이주 노동자들의 ‘인간 벌집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착취당하고 있다고 고발한다. 이것은 단순한 사회 고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기가 맞닥뜨린 노동착취 구조의 전환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라고 느껴진다. 노동착취는 어느 사회나 있기 마련이다. 스페인 사회의 한 부분을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의 배경과 소재가 된 바르셀로나 교외지역의 빈민계층은 상징적이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 중반 파시즘 정권의 이주정책으로 사회적 희생양이 된 가난한 샤르네고스(까탈로니아어 주로 쓰는 바르셀로나 지역에 살게 된 까스티아 스페인어를 쓰는 소수민들을 낮춰 부르는 말)의 거리들은 21세기에, 이제 불법 이주한 세네갈인들이 살고 있는 중국인들의 거리 ‘바리오 치노’로 바뀌어진다.
세네갈에서 온 불법체류자, 짝퉁가방을 만드는 중국인, 그리고 그 밑에서 일하는 또 다른 중국인들. 알레한드로 감독은 서로 다른 피부색을 가진 이들의 삶을 하나로 엮어 따로 또 같이 스페인사회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주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바르셀로나의 삶은 모두 어렵다.
샤르네고스의 거래는 모순 덩어리이다. 하지만 현실이다. 우리 사회의 모순이 집합되어 있다. 상호간 동화되지 못한 이주민들의 모습이 오늘 우리 한국사회에도 존재하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영화 속 욱스발이 가진 어두운 표정 속 근심의 ‘소용돌이’는 단지 가족 안의 문제만이 아닌 사회 바깥의 현실로 뻗어나간다.
영화 속에서 갑작스런 경찰의 단속으로 세네갈 친구가 추방되고 중국 노동자들이 머물던 창고에서, 욱스발의 애정이 오히려 중국 노동자 전원이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난다.
그리고 이혼한 아내 마람브라와 재결합하면서, 복잡한 문제들이 욱스발에게 일어난다. 어린 시절 죽은 아버지의 존재가 선명하게 그에게 다가온다. 과연 욱스발 자신은 어떤 아버지로서 아이들의 기억에 남게 될 것인가?
왜 욱스발은 죽음 사람들과 대화를 하고 그들을 ‘볼’ 수 있을까. 삶과 죽음의 문제를 동전의 양면처럼 우연한 사건의 연속으로 배치한다. 그것이 우리 인간사의 보편적 현상으로 보는 것이다.
과연 죽은 자와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초능력을 욱스발에게 있다고 설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약하디 약한 인간들의 모습 속에서 초능력자를 등장시킨 배경은 과연 무엇일까?
주인공이 바라보는 죽은 자들의 모습일가? 아니면 관객이 바라보는 죽은자들의 모습일까? 욱스발의 애정어린 동정에서 시작된 창고 속에서의 중국인 노동자들의 죽음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영화는 욱스발이 떠난 후 자신의 아이들을 맡길 사람으로서, 양극성 장애 문제로 심리적으로 불안하고 충실치 못한 아내 마람브라가 아니라 남편의 추방으로 의지할 곳이 없이 홀로 아기를 키우게 된 세네갈 출신의 젊은 어머니 이헤를 선택하는 것으로 결론을 낸다. 과연 그러한 욱스발 혹은 감독의 결정은 어떤 희망의 메시지일까? 아니면 삶의 혼란스러움에 대한 또 다른 증거일까. 그 결론을 쉽게 말할 수는 없겠지만 여전히 세계 속에는 여러 가지 삶들이 각각 공존하고 있다는 점을 느끼게 하는 영화이다. 지루한 영화이지만 나름대로 인간의 본성을 그대로 들어나게 하는 그래서 아버지로서의 나의 모습을 다시한번 생각하게 하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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