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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희준 정치컨설턴트 |
초나라 태생의 유세객 육고가 항우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한나라를 건국시킨 한고조 유방에게 진언한 말이다. 수성이 창업보다 어렵다는 경고의 뜻이 담긴 얘기였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말 위에서 천하를 얻는 대신에 천하를 시끄럽게 만들 수도 있다. 국정농단의 주인공인 최순실씨의 딸로서 이화여대 부정입학으로 커다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정유라와,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삼남으로 술집에서 취중 난동을 벌여 “역시나 피는 못 속인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환기시켜준 김동선이 대표적 사례다. 두 사람 모두 말 위에서 기량을 겨루는 국가대표 승마선수 출신이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바야흐로 말에서 내리려고 한다. 그는 아직 천하를, 즉 정권을 얻지 못했다. 그럼에도 왜 박원순은 그가 타고 있는 강남좌파라는 말에서 대선정국이 채 본격적으로 시작되지도 않은 국면에 굳이 내리려고 하는 것일까? 박 시장의 의중은 그가 1월 10일 국회 정론관에서 진행한 기자회견 내용에 담겨 있다. 그는 “차기 정부는 참여정부 시즌 2가 아닌 촛불공동정부여야 한다”고 선언했다.
대한민국에서 박원순을 격렬히 비판한 인사들을 빅데이터 기법을 이용해 조사해본다면 나는 다섯 손가락은 힘들어도 아마 열 손가락 안에는 들어갈지도 모른다. 내가 비유하자면 “스타벅스 카페에서 고급 원두커피를 여유 있게 홀짝이며 「체 게바라 평전」을 읽는 위선적인 강남좌파”의 대명사로 박원순을 지목해온 탓이다.
참여정부가 실패한 결정적 원인은 좌측 깜빡이 켜고 우측으로 운전대를 꺾는 겉 다르고 속 다른 양두구육의 반서민적인 국정운영 기조에 있었다. 문제는 참여정부의 그와 같은 몰염치한 행태가 강남좌파들이 발호하고 증식할 수 있는 최적의 토양을 제공해줬다는 점이다. 강남좌파의 내로라하는 구성원들이 한국사회의 돈과 권력에 뒤이어 드디어 명예와 인지도마저도 싹쓸이하게 된 저간의 배경이다. 강남좌파들의 등에 업혀 서울시청에 입성한 박원순이 나처럼 서울 강북 변두리의 외지고 가난한 서민층 주거지역에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전부 보낸 인간의 눈에 곱게 비쳤을 리 만무하다.
정권의 본질은 정권이 출범한 초기가 아니라 정권에 끝날 무렵에 통치권자가 누구와 어울려, 누구를 위한 정책을 펴느냐에 달려 있다. 참여정부는 호남과 함께하겠다며, 서민을 위하겠다며 닻을 올렸다. 하지만 임기가 종료될 즈음에는 영남 출신들이 검찰과 국정원 등의 정권 요직을 독차지했으며, 삼성그룹 비자금 사건의 유야무야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강행이 증명하듯이 재벌과 기득권층에게만 유리한 정책을 집행하는 데 열을 올렸다. 내가 2002년 당시 참여정부 최고존엄의 열렬한 지지자였다가, 정권 후반기에는 그의 혹독한 비판자가 된 이유다.
민선 서울시장이 이끄는 서울시의 성격도 비슷한 기준으로 감별해야 옳다. 그러나 참여정부와 박원순의 서울시는 진행방향도, 도달지점도 정반대로 나타난다. 박원순은 강남좌파들에 둘러싸여 서울시장에 취임했다. 그는 야당 당적의 역대 민선 서울시장들 가운데 강남권에서 가장 많은 표를 받은 인물이었다.
현재 박원순은 강남좌파들과는 상당히 소원한 관계에 놓여 있다. 그는 강북의 낙후와 소외를 극복하는 작업에 주안점을 두고서 시정을 진두지휘해왔다. 단적인 사례로 작년 추석에 잠실역 근처의 어느 중산층 아파트 단지를 지나다 보니 “재개발 방해하는 박원순 물러가라!”는 문구의 현수막이 아파트 외벽에 큼지막하게 걸려 있더라. 나는 “박원순은 시장직에서 절대 물러나면 안 된다!”고 속으로 그를 응원했다.
그렇다. 참여정부 최고존엄이 자신의 정체성도, 핵심적 지지기반도 강북서민에서 강남좌파로 옮겨갔다면 박원순은 철두철미한 강남좌파에서 출발해 강북서민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하는 정치인으로 스스로를 차츰차츰 진화시켜왔다. “보수도 강남, 진보도 강남”이 정치권을 위시해 관계, 재계, 학계, 법조계, 언론계, 문화계, 심지어 연예계에서까지 지배적 사회풍토인 오늘날, 박원순의 이러한 역주행 아닌 역주행은 과거 참여정부 최고존엄의 부산 출마보다도 어쩌면 몇 배는 더 위험하고 무모한 도전과 모험일지도 모른다.
나는 정치의 개념을 “국민과 함께하는 위대한 도전과 모험”이라고 오래전부터 정의해왔다. 야당으로의 정권교체가 기정사실화된 현재, 거의 모든 더불어민주당 대선주자들은 국민과 함께하는 위대한 도전과 모험을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그들은 강남좌파와 함께하는 무원칙한 선거연대와 정치공학적 대세몰이에만 골몰한다.
이 와중에 터져 나온 사건이 더불어민주당의 소위 싱크탱크인 민주정책연구원의 개헌저지 문건작성 파동이고, 극렬 문재인 지지자들이 자행한 반대파 정치인들에 대한 문자 테러와 후원금 테러 사태다. 전두환 5공 시대의 용팔이를 연상시키는 반민주적인 폭력적 정치 테러와, 한나라당 총재 시절의 이회창의 주특기였던 소속 의원 줄 세우기는 국민과 함께하는 위대한 도전과 모험이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 패권주의적 정당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목불인견의 볼썽사나운 병리학적 현상들이다.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 강남좌파라는 완장은 최고․최강의 무소불위한 기득권이다. 주장은 해도 책임은 절대로 지지 않는 안전하고 편리한 위치가 바로 강남좌파다. 선출되지도, 책임지지도, 교체되지도 않는 이른바 원로권력을 마음껏 만끽할 수 있는 자리가 다름 아닌 강남좌파다.
이 물 좋은 기득권을 박원순은 자발적으로 포기했다. 그가 참여정부 시즌 2는 안 된다고 일갈한 일은 강남좌파들이 다시는 정권의 주도권을 줘서는 안 된다는 엄중하면서도 불퇴전의 선전포고다. 강북의 평범한 서민대중을 위한 혁명적인 개혁정권을 수립하자는 진정으로 대담하고 급진적인 제안이다.
박근혜의 헌법유린과 최순실의 국정농단이 어째서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사악한 죄악이겠나? 박근혜-최순실 콤비가 만들려던 나라는 “아버지 판사하시고, 어머니 성악하시는” 부유한 특권층 자제들을 위한 나라인 까닭에서였다. “아버지 주방에서 닭 튀기시고, 어머니 홀에서 서빙하시는” 우리네 보통 사람들의 아들딸들을 위한 정치를 역사적인 박근혜 탄핵은 더 이상 미룰 수도 없고, 미뤄서도 안 됨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강북의 서민대중을 위한 나라와 세상을 만들겠다고 결연히 다짐함으로써 서울 강북에 정치적 근거지를 가진 유력한 차기 대통령 후보자는 이제 하나에서 둘로 늘어났다. 다른 한 명은 국민의당 안철수 의원이다.
대선주자의 숫자가 적다고 기가 죽을 필요는 없다. 성공하는 정권은 부자의 편이 아닌 서민의 편에, 지식인의 편이 아닌 일반 대중의 편에 서는 정권이기 때문이다. 강남좌파와 결별함으로써, 강남좌파 철밥통을 자기 손으로 깨부순 결과로 박원순은 단기적으로 심각한 고전에 직면할 것이다. 허나 특권적 강남좌파와 더불어 사는 길은 잠시 살고자 확실히 죽는 길일 뿐이다. 반면에 강북의 서민대중과 함께하는 길은 지금 당장은 죽는 것 같이 보여도 영원히 사는 길이다. 강북 서민의 한 사람으로서 박원순의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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