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代가 현충원에 안장… 호국 명문대가 ‘수당 이남규’ 가문

    기획/시리즈 / 이진원 / 2018-06-27 1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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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일 · 참전으로 대를 이은 순국 충절···
    항일투쟁 앞장서다 순국한 1 · 2代 이남규·이충구
    만주로 망명해 독립 운동가로 활약한 3代 이승복
    6.25 전쟁 때 배수진 치고 적 막았던 4代 이장원

    ▲ (왼쪽부터) 수당 이남규, 유재 이충구, 평주 이승복, 이장원 해병중위
    [시민일보=이진원 기자] 대한제국기 경술국치로 나라를 잃자 ‘삼한갑족’으로 알려진 경주이씨 우당 이회영 6형제는 전 재산을 처분해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를 망명, 항일투쟁에 앞장섰다. 백사 이항복의 후손으로 명문가의 자존심을 독립운동을 통해 지켜낸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명문대가’로 알려진 한산이씨 수당 이남규(1855~1907) 가문 역시 명문가의 자긍심을 지키고자 대한제국부터 6.25전쟁에 이르기까지 국난의 시기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4대가 현충원에 안장된 가문으로서 주목받아 왔다.

    특히 이남규 가문에 대한 이야기는 2015년 KBS1TV 현충일 특집 다큐멘터리 <백년의 유산>을 통해 드러난 바 있으며, 이듬해인 2016년 ‘제61회 현충일’에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현충일 추념사를 통해 더 알려졌다.

    당시 박 전 대통령은 “이장원 중위는 6·25전쟁 당시 함경남도 영흥만 황토도 전투에서 병력의 절대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대규모 공격을 저지하는 큰 공을 세우고 산화했다. 이러한 이 중위의 위국헌신의 바탕에는 4대에 걸쳐 가슴 깊이 새겨진 조국에 대한 충심과 애국심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증조부 이남규 선생과 조부 이충구 선생은 구한말 항일 의병활동을 하시다 일제에 체포되어 피살되셨다. 부친 이승복 선생도 독립운동에 투신하신 애국지사셨다”면서 “이분들의 숭고한 애국애족의 정신이야말로 우리가 마음에 깊이 새기고 계승해야 할 위대한 정신적 유산이라”고 강조했다.

    이남규 가문의 걸어온 역사에 대해서는 충남 예산군 대술면 소재의 수당고택과 수당기념관을 통해 전해지고 있으나, 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까지 생소한 게 사실이기도 하다.

    이에 <시민일보>에서는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까지는 항일투쟁으로, 6.25전쟁 때에는 국군 장교로서 애국애족의 본을 보였던 이남규 가문에 대해 자세히 살펴봤다.

    ▲ 이남규 가문의 가족들이 생활해 온 수당고택.(사진제공=국가보훈처)
    ■ 호국정신으로 ‘명문가’의 맥을 잇다

    수당 이남규의 가문인 한산이씨는 고려시대 후기부터 조선시대까지 걸출한 인물을 배출했다.

    주요인물로는 고려말 대학자이자 대문호였던 목은 이색(1328~1396)과 그의 아버지 가정 이곡(1298~1351)이 있으며, 사육신 중 한 명인 백옥헌 이개(1417~1456)와 ‘걸인청’을 만들어 빈민구제에 앞장섰던 선각자 토정 이지함(1517~1578)도 있다.

    뿐만 아니라 이지함의 조카인 아계 이산해(1539~1609)와 명곡 이산보(1539~1594)는 동시대에 영의정과 이조판서를 지냈다. 이남규와 동시대를 살아왔던 종친 중에는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운동가였던 월남 이상재(1850~1927)가 있다.

    특히 이남규는 이산해의 후손으로서 후손들에게 “문장에 대한 연원을 다른 곳에서 구할 것 없이 가학(家學)에서 구하여야 한다”고 말 할 정도로 가문 대대로 전해져온 학문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이남규는 항시 선조들의 삶을 본받아 나라를 위해 충을 다해 명문가의 맥을 이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이며, 훗날 그 뜻은 후손들로 이어져 4대가 현충원에 안장된 가문이라는 명예를 안게 했다.
    ▲ 이남규 부자 순절지에 설치된 기념비.(사진제공=국가보훈처)
    ■ 일본에 투항하다 ‘순국’한 이남규 · 이승복 부자

    이남규과 유재 이충구(1874~1907) 부자는 때로는 글로써, 때로는 행동으로써 구한말 항일운동에 앞장섰던 인물이었다.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에 따르면 이남규는 1861년 허전의 문하에 들어가서 일찍이 유학으로 이름을 떨쳤다. 1875년 사마시에 합격해 승문관권지부정자를 거쳐 형조참의·영흥부사·안동관찰사 등을 역임하다가 을미사변 후 향리로서 예산으로 내려갔다.

    특히 그의 반일활동은 상소운동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1893년 ‘입도왜병척축소’를 올렸으며, 1894년 일공사 오토리 게이스케가 군사를 이끌고 입성하자 ‘청절왜소’를 올렸으나,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청군신상하배성일전소’를 올린 뒤 깨끗이 처신할 것을 결심하고 두문불출했다.

    1906년에는 면암 최익현이 의병을 일으킬 것을 권했으며, 곧이어 민종식이 의진을 일으켜 홍주(지금의 충남 홍성군)에 입성함에 그 선봉장에 임명됐지만 ‘합법적이고 비폭력적인 투쟁’에 가치를 두었던 터에 참여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향후 홍주의진이 크나큰 피해를 입고 민종식이 그를 찾아오자 은신처를 제공해줬다. 또 그리고 민종식의 참모이며 그의 족친인 이용규의 청을 들어서 자신의 집을 중심으로 홍주 탈환 작전 본부를 형성했으며, 1906년 10월5일 거사 준비를 마쳤다.

    그러나 불행히도 해당 계획이 사전에 누설돼 충남관찰사 김가진의 명에 따라 10월2일 일본 헌병과 관군 수십 명에 의해 이용규·곽한일·박윤식을 비롯해 그의 아들인 유재 이충구(1874~1907)와 함께 체포됐다.

    당시 적군은 민종식의 거처를 확인하고자 무수히 고문했지만 이남규는 자백하지 않았다. 그런 중 아들이 고문에 못 이겨 혀를 깨물자 이미 민종식이 다른 곳으로 피신한 것을 알고 자백했다.

    끝내 적군은 민종식의 거처를 탐문해 찾아냈으며, 이남규는 홍주의진과 무관하다는 판정을 받고 풀려나왔으나 의진과 관계가 있다는 일진회원의 밀고가 끊이지 않자 1907년 8월19일 다시 체포됐다.

    이에 그는 “나는 대부(大夫)다. 죽을지언정 욕을 당해 너희에게 포박될 수 있겠는가”하고 교자를 타고 가려고 했으며, 그의 두 아들이 쫓아 나오고자 했으나 “너희가 나를 따라 죽는다면 집안은 어떻게 되겠느냐”며 만류했다고 한다.

    그래도 그의 아들이 그의 뒤를 쫓았으며, 온양 위암촌(현 충남 아산시) 냇가에 이르러 적군이 그의 아들을 칼을 뽑아 베고자 하니 그가 아들에게 “서울에 가서 일의 결판을 기다려라. 어찌해 함께 죽임을 당하고자 하느냐”하며 칼을 손으로 막아 다섯 손가락이 잘렸다. 아들도 아버지를 보호하려다가 함께 순국했다. 이에 교노였던 김응길이 가마의 막대기를 뽑아 적군을 때려죽였으나 그 역시 적군의 손에 순국했다.

    이에 정부에서는 이남규의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으며, 이충구도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았다. 현재 이남규·이충구 부자는 국립대전현충원에 나란히 안장돼 있다.
    ▲ 이남규 3대 항일투쟁 사적비.(사진제공=국가보훈처)
    ■ 만주에서 ‘독립운동가’로 활약했던 이승복

    이남규의 손자인 평주 이승복(1895~1978)은 일제강점기 만주로 망명해 걸출한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독립운동에 일평생을 바쳤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따르면 이승복은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으며, 장통보통학교과 휘문고등보통학교, 그리고 남궁억이 교장으로 있던 청년학원에서 수학했다.

    이 무렵부터 장지영·강매 등에게 독립운동을 권유받고, 형 이민복과 함께 노령으로 망명했으며, 1913~1919년 노령과 북만주에서 이동녕·이회영·이시영·이상설 등과 교류하며 독립운동 기반을 마련하고, 독립운동의 방략을 모색했다.

    1920년에는 노령에서 박은식과 함께 ‘청구신문’을 발간했으며, 신문활자를 노령으로 운반한 일로 인해 일본 경찰에 체포돼 6개월간 구금당했다. 같은 해 7월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박용만·이민복·조성환 등이 조직한 ‘대한국민군’을 지원하기 위해 김병희와 함께 귀국해 군자금 모집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1921년에는 이시영·조완구·조소앙 등과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 연통제의 국내 조직을 결성하는 데 이바지했다. 1923년 1월 귀국했다가 김상옥 의사의 ‘종로경찰서 폭파 의거’에 연루돼 고초를 겪었으며, 같은해 7월 홍명희·홍증식·김찬 등과 함께 사상단체인 ‘신사상연구회’를 조직하고 조직간사로 활동했다.

    뿐만 아니라 정우회에 가담해 1926년 11월에는 연구부 상무집행위원에 선임됐다. 같은해 말 정우회 선언에 따라 ‘민족협동전선운동’이 전개되자, 1927년 1월 월남 이상재를 초대 회장으로 설립된 신간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같은해 2월 신간회 창립대회에서 선전부 총무간사에 선임됐다. 아울러 1927년 11월 이관용·권태석 등과 신간회 충남 예산지회를 설립하고 주도적으로 이끌어나갔다.

    1927~1933년에는 조선일보 이사 겸 영업국장으로 재직하며 언론을 통한 ‘민족계몽운동’에 힘썼다. 1928년 6월 조선교육협회의 정기총회에서 평의원으로 선출돼 민족교육에 이바지하기도 했으며, 1932년 안재홍 등과 재만동포 구호활동을 벌이다가 일제의 구호금 소비 조작으로 8개월간의 옥고를 치른 바 있다.

    1936년 3월에는 여운형의 도움을 받아 중국 항주에 있는 항공학교를 졸업하고, 남경·상해 방면에서 독립운동을 하려던 정필성을 중국으로 망명하도록 도왔다. 이후 1945년 3월 일본헌병사령부의 예비검속으로 구속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돼 있다가 광복으로 석방됐다.

    광복 후에는 대한민국건국준비위원회의 교통부장에 선임되었으나 고사했으며, 1946년 국민당 총무부장에 선임돼 활동하다가 같은 해 국민당이 한국독립당과 합당하자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됐다가 1948년 신한국민당의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됐다.

    한편 그는 1946~1948년 민주일보사의 부사장으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1951년 낙향해 한학 연구와 농업에 종사하다가 1978년 10월31일 서울에서 서거했다. 그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됐으며, 현재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돼 있다.
    ▲ 2017년 5월 충남 예산군 예당관광지 조각공원에서 열린 ‘이장원 중위 동상 제막식’에서 흉상 제막식이 진행되고 있다.(사진제공=예산군청)
    ■ ‘목숨 바쳐’ 敵의 해상보급로를 차단한 이장원

    이남규의 증손자이자 ‘6.25전쟁영웅’인 이장원 해병중위(1929~1951)도 선대의 충절을 이어받아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이장원은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4월 해병사관후보생 5기로 입대해 그해 9월 소위로 임관했다.

    임관 후 그는 적에 대한 후방교란과 해안봉쇄작전을 수행하는 해군 엄호의 임무를 띠고 해병 독립 42중대 소속 황토도 파견소대장으로 부임했다. 당시 황토도는 함경남도 영흥만 주변 아군의 해상봉쇄선상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로서 북한은 이 거점을 장악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습 공격을 시도하고 있었다.

    1951년 11월29일, 앞선 두 차례의 기습공격이 그의 부대에 의해 연달아 실패하자 북한군은 1개 대대라는 대규모 병력을 동원, 황토도를 향한 최후의 일격을 가해 왔다.

    북한군으로서는 자존심이 걸린 상륙작전이었으며, 얼마 후 적과의 치열한 교전 중 무전기마저 파괴되어 아군의 지원조차 기대할 수 없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이르렀으나 이장원과 그의 소대 는 물러서지 않았다.

    이처럼 악조건 속에서도 좀처럼 물러서지 않는 해병에 당황한 적은 결국 아군 진지에 집중포격을 실시했고, 이장원과 그의 부하 3명은 결국 적의 포탄에 전사했다. 소대장의 최후를 눈앞에서 맞이한 그의 소대는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북한군을 격멸, 진지를 사수하게 된다.

    이로써 3차례에 걸친 북한군의 황토도 공격은 모두 실패로 끝났으며, 이는 적의 해상보급로를 차단하는데 결정적인 기여했다는 평이다. 그는 1953년 ‘충무무공훈장’에 추서됐으며,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돼 있다.

    한편 충남 예산군은 지역출신 전쟁 영웅인 이장원의 공적을 기리고자 2017년 5월 ‘이장원 해병대 중위 동상 제막식’을 개최하고, 그의 흉상을 예당관광지 조각공원에 설치했다.

    예산군 관계자는 “이장원 해병대 중위 흉상이 6.25 전쟁의 아픔을 되새기고 참전용사의 고귀한 희생과 나라 사랑 정신을 고취하는 상징물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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