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대하소설 황제의 싸움터

다시보는 제주 4.3 民亂

시민일보

| 2003-08-27 19:41:41

(1) 불을 뿜는 海女示威

한남2리의 ‘진명의숙’(운천동 소재)에 야학이 시작된 것은 8·15해방 직후인 9월 1일부터였다. 4개동에서 초등부와 중등부 학생들이 저녁때가 되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3명의 강사 중 이만성은 주임강사로서 중등부를 도맡고 있었다.

중등부에 한 해 날마다의 수업은 22시(밤 10시)까지 꽉 채우기 일쑤였지만, 그날의 수업은 21시(9시)로 끝났다. 이만성의 돌연한 결근 때문이었다.

급한 볼일이 있어 제주읍에 갔다는 전갈을 받고 60여명의 학생들은 이해를 하면서도 아쉬움을 금할 수 없었다. 고정관을 따라 조용석, 서병천 등과 함께 ‘건준’ 김대호부위원장을 찾아가는 데 길잡이 구실을 한 사람이 이만성이었다.

이만성이 자리를 비운 그날 밤, 교실안의 분위기는 글자 그대로 적막강산 썰렁하고 쓸쓸했다. 이만성이야말로 ‘진명의숙’을 떠받친 아름드리 기둥이었다. 뿐만 아니라 60여명 학생들의 꿈이자 희망이었고, 따르며 존경하는 우상이었다.

그날밤 모든 학생들은 모처럼 한 번 있은 결강인데도, 다시는 볼 수 없는 얼굴 두 번 다시 들을 수 없는 목소리라고 단정해 버린 것도 아닌데, 가슴 한쪽 구석이 텅 빈 것 같은 허전함을 떨쳐버릴 수 없는 그런 얼굴들이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예외에 속하는 학생이 딱 하나 있었다. 여학생이었다.

“바로 오늘 밤이야 말로 하늘이 준 절호의 기회라니까. 오늘밤이 오기를 내가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던가? 신(神)만은 알겠지만…”

맘속으로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는 별난학생, 최정옥(崔貞玉·18)-이만성이 담임을 맡고 있는 중등부 16명(남자 10, 여자 6)중 한사람이었다.

친일파로 악명높은 최상균-최상수의 조카딸이기도 한 그녀는 동급생인 강은자(姜恩子·18), 양숙희(梁宿姬·18)을 쥐도새도 모르게 제거하기 위한 무서운 음모를 꿈꾸어 왔었는데, 오늘밤이바로 그년들의 제삿날일 줄이야! 하고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남의 떡 탐낼 게 따로있지. 이만성 그분은 나에게 있어서 어떤 존재인지 안 다음 군침을 흘려도 흘려야잖아? 죽으려고 환장한 년들 죽여주마! 이만성 그분은 나의 생명의 은인이다 그 말이야. 6개월전 3명의 일본군인들에게 윤간당하려는 순간, 극적으로 구출해준 거룩한 은인이 바로 이만성선생이시다. 알겠냐?”

거사를 눈앞에 둔 최정옥의 가슴은 격하게 뛰었다. 아침나절 이만성이 낯선사나이(서병천)와 함께 도선마을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던 도중, 노상에서 딱 마주쳤었다. 이만성은 반색을 하며 최정욱을 대해 주었던 것이었다.

“마침 잘 만났군, 내가 지금 급한 일로 제주읍에 가는 길이거든. 오늘밤 늦게 돌아올 것 같단 말야. 결근을 하게 되어서 미안하기 짝이 없다니까. 강선생과 민선생께 내가 결강하게 된 사정 잘 말씀 드려줘 응!”


“네, 염려마세요. 잘 말씀 드릴테니 맘 푹 놓으시고 안녕히 다녀오세요!”

최정옥은 하늘을 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날 저녁 일찍 출석해서 이만성의 ‘구두결근계’를 ‘진명의숙’에 정식으로 제출했다.

그런데, 기다리고 기다리던 운명의 날이 왔음을 깨닫게 된 그녀는 아침나절 이만성과 헤어진 순간부터 소위 ‘앙숙제거작전’을 부리나케 서둘렀다.

‘오늘저녁 조용히 할 얘기도 있고, 내가 점방(가게)에서 빵과 과자를 푸짐하게 대접할테니까 그리알고 함께 가자, 숙희 너두…”

최정옥은 수업(자습)이 끝나자마자 강은자에게 눈웃음치며 선심(善心)공세를 폈다.

“아니, 니가 왜 갑자기 안하던 짓을 하려구 그래? 저녁때 뭘 잘못 먹은 것 아냐? 호호호”

강은자는 굳어진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거리느라 침먹은 지네꼴인데, 쾌활한 성격의 양숙희는 입맛을 쩝쩝 다시며 솔깃함을 감추지 못하고 맞장구를 쳤다.

“강은자, 너는 싫어? 내 호의가 달갑지 않다 그말이냐? 내가 산다잖아? 비싸게 놀지말고 따라오기나 해!”

최정옥은 핀잔을 주며 손목을 낚아채어 난폭하게 끌어당기는 것이었다.




[ⓒ 시민일보.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최근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