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키운 건 할아버지

한나라당 맹형규 의원

시민일보

| 2006-10-22 17:21:34

내 할아버지는 교육계의 원로로 경기고, 용산고, 서울사대부고 등에서 교장 선생님으로 계시다가 정년퇴직을 하신 후에 보성고에서 교장 선생님을 하셨고, 대종교의 최고지도자인 총전교(總典敎)를 지내시기도 했는데, 내 기억 속의 할아버지는 늘 소탈하고 검소한 분이었다.

품이 작아 입지 못하게 된 양복일지라도 단춧구멍 자리에 천을 덧대어 깁고 거기에 새로이 단춧구멍을 만들어 입으실 정도로 검소했고, 관사 마당이나 주변 산비탈의 노는 땅을 텃밭으로 일구어 호박에 가지며 상추, 배추, 무 등을 손수 가꾸셨다. 덕분에 할아버지를 도와 동대문시장 종묘상을 드나들며 종자로 쓸 씨앗 심부름이며 두엄더미를 만드는 일, 또 똥장군을 짊어지고 거름 구덩이를 채우는 일은 온전히 내 몫이었다. 사실 사춘기를 막 지나는 내겐 썩 내키는 일이 아니어서 그 시절엔 반항도 많이 했다. 하지만 그것이 땅과 땀에 대한 철학을 가르치려던 깊은 뜻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건 머리가 제법 큰 뒤의 일이다.

나는 아직도 흥이 오른 술자리에서거나 술이 잔뜩 취해도 좀처럼 실수를 하지 않는다. 역시 엄한 할아버지의 영향이다. 나와 함께 술을 마시는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맹형은 어떻게 그렇게 마시고도 취하질 않아?”라며 신기한 듯 묻곤 하지만 술에 장사 없다고 마시고 취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다만 취한 티를 내지 않을 따름이지.
할아버지를 찾아온 손님들의 술심부름을 하고 아주 어릴 적부터 어른들이 건네는 잔을 홀짝홀짝 받아 마시다 보니 주량이 제법인 것도 사실이다. 대학 시절 내 별명이 ‘신촌 백구두’였는데, 까만색 구두가 흘린 막걸리로 하얗게 변할 정도라고 해서 친구들이 붙여 준 별명이다.

하지만 그렇게 술을 마시고도 내 잠자리에 눕기까지는 거쳐야 할 통과제의가 꼭 하나 남아 있었다. 아무리 늦은 시간이라도 내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주무시는 법이 없는 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리는 일이 그것이다. 취해서 비틀거리거나 혀 꼬부라진 소리를 내면 불호령이 떨어질 것을 뻔히 아는 터라 할아버지 앞에서 “다녀왔습니다”라는 말을 하고 돌아설 때까지는 취할 수도 취한 척도 할 수 없었다.

“사내란 무릇 진퇴를 분명히 해야 한다.”

할아버지께서 늘 틈날 때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려주신 말이다. 당시야 무슨 선문답처럼 들려서 가슴에 와 닿지 않았지만, 사회생활을 시작한 뒤로 이 말은 내게 일종의 좌우명처럼 되었다.

연합통신을 그만두고 국민일보사로 이직을 할 때에도, 국민일보사를 그만두고 서울방송으로 옮길 때에도, 또 서울방송을 그만두고 정치권에 첫발을 내디딜 때에도, 늘 선택의 갈림길에 서면 할아버지의 말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고민은 냉철하게 하되 일단 새로운 결심이 서면 우물쭈물함이 없이 깔끔하게 정리를 했고, 모든 사람들의 축복 속에 새롭게 출발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할아버지의 가르침 덕분이다.

서정주 시인을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할아버지’다.

정치권에 들어와서 가끔씩 ‘맹한 사람’이라는 비아냥을 듣는다. 선거 때는 아예 빠지지 않는 단골 메뉴이고, 상대가 듣기에 껄끄러운 소리라도 할라치면 어김없이 맹하다는 공격이 쏟아진다. 코흘리개 시절에나 철없는 친구들에게서 성씨에 빗대어 듣던 우스갯소리를 머리 희끗한 나이가 되어서도 듣는다는 현실이 서글프지만, 그것이 우리 정치의 현주소인 것 같아서 듣는 나도 안타깝다.

허나 그것이 제 밥그릇 챙기는 일은 뒷전이고 그저 열정 하나로 돈도 안 되고 표도 안 되는 일에 목숨을 거는 여전한 아마추어라는 뜻의 ‘맹한 맹형규’라면 언제든지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선 약삭빠른 것보다 맹한 것이 더 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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