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과 경험

한나라당 맹형규 의원

시민일보

| 2006-10-26 17:06:03

잠자는 것도 동생들과 함께 재롱을 떠는 일도 시들해졌던지 슬슬 장난기가 발동했다. 일찍부터 동네에 알짜하게 소문난 장난꾸러기였던 내가 아닌가. 낯선 배라고 해서, 피난길이라고 해서 굳이 참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배에 오르면서부터 유심히 봐두었던 것이 하나 있었다. 하늘 높이 치솟아 펄럭이는 돛이었다.

무료함을 이기지 못해 배 안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돌아다니다가 돛 아래에 이르러서는 머리를 하늘로 꺾고는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돛을 매단 밧줄을 보고는 ‘저걸 풀면 어떻게 될까?’ 하는 호기심이 생겼다. 돛단배에서 돛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정도만 아는 나이가 되었어도 감히 엄두내지 못할 생각이다.

어느새 나는 슬금슬금 밧줄을 풀기 시작했다.

‘촤르르르르―’

밧줄이 풀리는 것과 동시에 거대한 돛이 갑판을 향해 쏟아져 내려온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 사람들이 급하게 쫓아 나오고 큰일났다며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고서야 비로소 내가 일을 저질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혼쭐이 난 것은 물론이고 배 안에 타고 있던 다른 어른들에게도 눈물이 쏘옥 빠지도록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 그렇게 진한 눈물의 밤을 새우고 나서야 우리는 마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서울 원서동 개구쟁이의 진면목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일화다.

마산에서는 방 한 칸을 빌려 살았다.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나와 동생들이 가지런히 누우면 딱 맞을 만큼 작았다. 다닥다닥 붙여 지은 작은 방을 피난민들에게 빌려 주는 집이었는데 어찌나 허술하게 지었던지 옆방에서 나누는 말소리는 물론이고 코고는 소리, 껌 씹는 소리도 들릴 정도였다. 칸만 막아 놓아 보이지만 않을 뿐이지 서로 드러내 놓고 사는 셈이었다.


가뜩이나 옆방에서 나는 소리 때문에 시끄러워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할 지경인데, 밤이 되면 또 다른 소리까지 보태져 들렸다. 다다미가 깔린 방바닥에서 나는 소리였다. 쿵짝거리는 음악 소리도 들리고 무슨 좋은 일이라도 생겼는지 왁자하니 웃고 떠들어대는 소리도 들렸다. 알고 보니 그곳은 요즘으로 치자면 나이트클럽이라 할 댄스클럽이었다.

밤마다 쿵짝이는 소리에 잠을 못 이루는 것도 부아가 나고 시끄러운 것도 눈살을 찌푸리게 했지만 어린 마음에도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전쟁통에 희희낙락대는 꼴이 몹시 거슬렸던 모양이다.

이 넋 빠진 어른들을 곯려 주어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어느 날 위층 우리 방에서 아래층 댄스클럽을 향해 냅다 오줌을 갈겨 댔다.

갑작스런 오줌 세례에 클럽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어 버렸고, 덕분에 눈물이 쏙 빠질 정도로 밤새 혼찌검이 났지만 닻의 밧줄을 풀던 그날과는 아주 다른 묘한 쾌감을 느꼈다.

전쟁을 겪은 많은 사람들의 숱한 증언처럼 길가에 나뒹구는 시체를 보았다거나 주민들을 모아 놓고 총살을 시켰다는 등의 살풍경한 모습을 나는 보지 못했다.

내가 겪은 가장 큰 공포라야 비행기에서 굉음과 함께 쏟아 붓던 기관총 소리가 전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기억 속의 전쟁은 그 자체로 공포다. 또한 길고 지루한 피난길의 고생, 옆방의 소음을 들으며 생활하고 아래층에서 새어 나오는 시끄러운 음악 소리를 들으며 잠드는 불편함, 곱고 단아한 어머니가 머리에 떡을 이고 돌아다니며 장사를 해야 하는 궁핍함으로 다가온다.

내 기억과 경험 중에서 내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은 단 하나, 그것은 바로 전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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