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의 작명논쟁은 무엇이더냐?
이노근(노원구청장)
시민일보
| 2006-11-28 17:44:28
이 천학은 옛날부터 광화문에 관한 작명유래를 말할 때 항상 사악한 유언비어(流言蜚語)에 시달려 왔다. 차제(此際)에 그 황당한 괴설(怪說)을 말끔히 해명하는 것도 유용한 학습과제일 거다.
그 진원지(震源地)는 소위 오문(午門) 또는 정문(正門)을 광화문으로 바꾼 데서 출발한다. 바로 소위 작명 고명설(誥命說)이 그것이다.
‘중국의 명나라 자금성은 천안문(天安門)이고… 조선의 경복궁은 광화문(光化門)이다… 천자(天子)의 나라 중국은 천(天)을 머리글자로 사용했고… 조선은 그 하늘로부터 그 빛을 받는 제후국(諸侯國)인지라 광(光)자를 사용했다… 그러니까 항렬(行列)상 ‘천(天)’은 부격(父格)이고 ‘광(光)’은 자격(子格)이라는 주장이다.’
그렇잖아도 태조 이성계는 건국 초 1392년에 명나라에 조선(朝鮮)이라는 국호(國號)를 윤허(允許) 받았다고 하는 터에 그러한 논쟁은 심히 자존심을 건드리는 거다. 나는 백방으로 그 의심을 해소해 보려했으나 지금껏 그걸 풀지 못했다.
이 천학이 경복궁 작명역사(作名歷史)에 관해 보유한 정보(情報)라고는 그저 태조 이성계가 정도전에게 하명하여 지었다는 것이 전부이다.
그렇다면 동행한 이 영감은 과연 그걸 해명해줄 수 있을까?
“태조 이성계는 경복궁 낙성식(落成式)을 앞두고… 이름을 무엇이라고 지을까 고민을 했어요… 그래서 당대 최고의 유학자이자… 그 건설 책임을 맡았던 정도전에게 작명을 명하였어요.”
나는 연속하여 질문을 퍼부었다.
“그렇다면 정도전이 그 이름을 지었겠군요?”
그 영감은 조선왕조실록까지 동원하는 열의를 보였다.
여하튼 그 작명풀이는 조선왕조가 태평성대(太平聖代)를 누리도록 발원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광화문의 명칭을 지었을까?
나는 그 작명경위에 관한 정보를 찾기 위해 조선왕조실록의 태조 편을 뒤졌다. 원래 경복궁 공사 당시에는 궁궐 정문은 속칭 오문(午門)으로 불렀으나 고유명칭은 광화문이었다. 그 정문이 정남(正南)으로 태양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낙성식에서는 정문(正門)으로 공식 명칭 하였다.
잠시 그와 관련된 조선왕조실록에서 그 문장 일부를 퍼오겠다. 정도전이 태조 이성계에게 올린 내용이다.
‘천자(天子)와 제후(諸侯)는 그 권세가 다르다 하나 그 남쪽을 향해서 정치하는 것은 모두 정(正)을 근본으로 함이니… 천자의 문을 단문(端門)이라 하니 단(端)이란 바르다(正)는 것이다… 이제 오문(午門)을 정문(正門)이라 함은 명령과 정교(政敎)가 다 이 문으로부터 나오게 되니… 살피시고 윤허(允許)하신 뒤에 나가시면 참소(讒訴)하는 말이 행하지 못하고 조작과 거짓으로 부탁하지 못할 것이며… 문을 닫아서 사특한 백성을 끊게 하시고… 문을 열어서 사방의 어진 이를 오도록 하는 것이 정(正)의 큰 것입니다.’
여하튼 그 정문(正門)이라는 명칭은 다시 세종 때 와서 광화문으로 개명하였는데 당시 그걸 주도한 사람은 집현전 석학들이었다.
신기한 것은 조선의 정치이념 인의예지신을 도성의 사대문에 작동시켜 각각 작명했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누군가 함부로 광화문 작명에 관한 그런 황당한 고명설(誥命說)을 퍼뜨리고 있는가!
강원도(江原道)에 가면 해안 경관이 빼어난 정동진(正東津)이라는 마을이 있다. 그런데 그 지명 유래에는 놀랍게도 광화문과 결부돼 있다. 바로 경복궁 정문’광화문’에서 동쪽으로 정방향(正方向)에 있다하여 불리어진 거다. 이 지명은 남도 해남의 땅 끝 마을 토말(土末)과 함께 조선 초기 지리학이 그만큼 발달 되었다는 증거가 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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