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편액(扁額) 글씨
이노근(노원구청장)
시민일보
| 2006-11-30 14:44:28
‘원래 광화문 편액 글씨의 주인공은 서예가(書藝家) 정학교(丁學敎·1832~1914)이시다… 그걸 복원할 때 원작가(原作家)의 글씨로 복원해야 하는데도… 당시 박정희 대통령 글씨로 대신했다.’
‘글자 순서도 우좌횡서(右左橫書)가 아니라 좌우횡서(左右橫書)로서 그 의미를 반감시켰다… 그러하니 그걸 교체해야 한다.’
결국 그 찬반 논쟁의 종점은 그 편액 글씨를 원작품(原作品) 서체로 바꿔 달아야 하느냐 아니면 그냥 놔둬야 옳으냐 일거다. 그러나 막상 그에 관한 당신의 소견(所見)을 말하라면 주저하지 않을 수 없다.
자칫 천학(淺學)이 만용을 부려 내가 북악산 기슭의 어느 현대판 군주처럼 “그것은 마땅히 철거돼야해… 칼집에 넣어 박물관으로 보내야지”라는 폭견(暴見)이 발동 될까봐 두렵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천학은 도저히 인내심이 부족하여 탑골공원의 삼일문(三一門) 현판 철거 난동(亂動)에 관한 소견(所見)까지 유예 할 수는 없다. 아마 2001년 말로 기억된다.
‘갑자기 일단의 난중(亂中)들이 곡괭이를 움켜잡고… 탑골공원의 정문 삼일문(三一門) 앞으로 몰려들더니… 잽싸게 그 현판(懸板)을 마구 쳐서 내동댕이치고… 몇 차례 대한민국 만세라고 고함을 지르고 달아나 버렸다.’
그 이유는 ‘어찌 친일분자 박정희(朴正熙) 글씨를 3·1 독립운동의 성지(聖地)에 버젓이 놔둬야 하느냐’였다.
그 당시 현판을 몰래 철거하는 것은 정말 규탄 받아 마땅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 편액을 다시 박대통령 서체(書體)로 복원해야 옳으냐’로 양 갈래 찬반주장된 공방을 벌였는데 결국은 교체되었다. 독립신문의 활자 인쇄본에서 삼일문 글자를 찾아 집자(集字)하여 새로 달았는데 그 글자 모양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박정희 대통령 글씨체와 아주 흡사하게 닮았다. 여하튼 그렇게 하여 그 사건은 슬그머니 일단락되었다.
‘그렇다면 광화문 현판글씨를 바꿔야 옳으냐?’
2005년 삼일절 직전에 대한민국 문화참판(文化參判)이 박대통령 글씨를 철거하고 그 대신 정조대왕(재위:1777~1800년) 글씨로 바꿔 달겠다고 소동을 피웠다가 험한 꼴을 당했다.
그러나 그 문화참판은 거친 반대 여론을 감당(堪當)할 수 없게 되었는지 이런 말로 슬며시 물러섰다.
“옛날 광화문 복원은 어차피 위치와 각도(角度)가 잘못됐기 때문에… 언젠가는 다시 원형으로 고쳐야 하지요… 그때 박대통령 글씨를 떼어내고 다시 정조대왕 글씨로 할 건지 말 건지를 검토 하겠어요.”
결론부터 말하면 그런 결정은 너무 경솔했던 것 같다. 그 이유는 이러할 거다.
첫째 정조대왕은 개혁명군(改革明君)임에는 틀림없으나 창덕궁에서 정무를 보셨기 때문에 경복궁과는 아무 인연이 없고 둘째 원래 궁궐 전각이나 궐문(闕門)과 성문(城門)의 편액은 당대의 군주(君主)도 그 서체가 훌륭하면 써 왔으며 셋째 설사 교체를 한다면 원작자 정학교의 필본(筆本)에서 그의 서체를 집자하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광화문 편액논쟁은 여기서 그만두고 그 화제를 바꿀 터이다.
그 화두는 궁궐의 경호제도를 알아 볼 터이다.
“그런데 영감님! 저기 저 광화문 입구 병졸(兵卒)들은 무엇하는 거죠?… 옛 군장복(軍裝服)과 병장기(兵仗器)로 무장하고 있는데요?”
바로 왕궁 수문장 교대의식이었다. 그 노교수의 강론은 계속됐다.
“그걸 알려면 먼저 어떻게 궁궐방위를 하였는지 알아야 할 거요… 궁궐방위는 ①내병조 ②오위도총부 ③수문장청 ④삼군영이 골고루 참여했어요… 지휘권에 견제와 균형으로 반란을 방지하기 위한 거라지요.”
그러나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임금이 암행으로 민정사찰을 할때에 과연 누가 호위를 하였느냐이다.
“임금이 민복차림으로 저자거리등을 나가 비밀리에 민정(民政)을 살필때는 군복과 병장기로 무장할 수가 없지요. 이때는 금군군사(禁軍軍士)들 중에 택견 고수들이 나서 왕의 앞뒤에서 호위하였다고 하지요.”
그러나 경복궁 답사꾼이 신나는 것은 무엇보다 왕궁수문장 교대의식을 구경하는 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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