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문의 수문규칙(守門規則)
이노근(노원구청장)
시민일보
| 2006-12-03 16:10:48
“그렇다면 수문군은 어떻게 교대하나요… 수문규칙(守門規則)은 어떠했나요?”
이제 노객은 경복궁 강론에 어느 정도 탄력이 붙었는지 목청을 높여갔다.
“시대별로 다소 차이는 있었지만 병조 소속으로 수문청(守門廳)이 있었어요… 군병(軍兵)은 약 70~80명가량이었어요… 수문군은 궁성문 출입을 관장하는 수문장(守門將·무관4품) 궁성문, 밖을 순찰하는 요령장(搖鈴將·무관4품), 광화문 문루의 대종고(大鐘鼓)를 관리 감독하는 수종장(守鐘將, 무관5품), 갑사(甲士), 대졸(隊卒) 등으로 이루어 졌어요.”
그렇다면 먼저 궁궐문은 누가 열고 닫나요?
“그 임무는 왕실의 안위(安危)와 관련이 되는지라 아무나 시킬 수 없지요… 그래서 승정원주서(6품 벼슬) 액정서사약(내시부잡직) 도총부경력(수도방위부서)이 함께 모였을 때 비로소 궁성문을 열고 닫을 수 있지요.”
“그러니까 3개의 관청이 연계 관리하는 것은 그만큼 엄격하다는 뜻이죠… 물론 궁궐문 열쇠는 승정원 주서가 가지고 있어요.”
그 다음에 수문군들이 교대(交代) 할 때는 어떻게 하나요?
“교대조(交代組)끼리 암구호(暗口號)를 외치고 나서 수문장패(守門將牌)를 내밀어 서로를 확인한 다음 교대를 하지요… 이때 교대 조끼리 출문부(出門簿)와 궤함 등도 인수인계하지요.”
하여간 그 수문군 교대절차는 그렇게 엄중했다.
그토록 수문규율은 엄했으나 실제로는 궁성문(宮城門)에서 자주 불상사가 일어나 수문군이 곤혹(困惑)을 치렀는데 그 사례를 보면 재미있다. 여하튼 나는 조선왕조실록을 뒤져서 그에 관한 역사 다큐멘터리 몇 개를 소개하여 볼 터이다.
먼저 중종 20년(1525년) 신무문(神武門) 수문군의 기강문란은 그 정도가 매우 심각하였다.
중종 20년 건춘문(建春門) 화살 사건을 알면 흥미가 배가 될 거다.
‘좌승지 유여림 등이 아뢰기를, 건춘문의 수문장 전헌경이 와서 고(告)하기를 화살에다 글발을 매어 쏜 것이 건춘문 벽 위에 꽂혔다고 합니다. 이는 익명서(匿名書)에서 전파해서는 안 되고 마땅히 즉시 소각해야 하는데 다만 대궐문에다 쏜 것이기 때문에 아룁니다.’
이때 중종(재위:1506~1544년)은 바로 건춘문의 요령장(搖鈴將)과 군사들이 그걸 제대로 막아내지 못했다며 그들을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수문군(守門軍)을 황당하게 만드는 것은 그것뿐이 아니다.
“조정 정치가 잘못 돌아가고 있거나 백성들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백성들이 궁궐 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곤 하였는데… 그 때마다 수문군들은 아주 곤욕을 치렀어요.”
그 노교수는 조선시대 시위양태를 설명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조정이나 관아(官衙)에 대한 시위는 다양하였지요… 상소(上疏), 석고대죄(席藁待罪), 신문고(申聞鼓) 등은 제도권에서 주로 이용하는 방법이지요… 특히 수 천 명이 연명(連名)으로 상소하는 것을 만인소(萬人疏)라 하고요… 대소신료(大小臣僚)들이 정치적 소신(所信)을 굽히지 않기 위해 죄(罪)를 청하는 시위(석고대죄:席藁待罪)가 있어요.”
그러나 재야 사학자들은 그런 제도권 시위보다는 비상적(非常的)인 방법으로 표출하는 항의문화에 더 관심을 갖는다.
“관가의 문이나 벼슬아치가 행차할 때 북과 징을 요란하게 쳐대거나(격쟁:擊錚)… 야밤에 횃불을 피우며 함성을 지르거나(봉화:烽火)… 성균관 유생들이 궁궐 앞에서 왕을 향해 하는 시위(공당:空堂) 등등… 그렇지만 아주 간악하고 험악한 자들은 익명장(匿名狀)을 화살촉에 꽂아 남의 대문짝에 쏘거나… 음침한 저자거리 담벼락이나 나무에 익명으로 방(榜)을 붙이거나… 때로는 활빈당(活貧黨)을 자처하며 관리들의 부패를 고발하기도 했지요.”
그런 황당무계한 불상사가 궁궐문 앞에서 일어날 때마다 그 수문군들은 괜한 낭패를 당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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