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헌 탄핵
이노근(노원구청장)
시민일보
| 2006-12-12 19:13:24
여하튼 그러한 관서(官署) 중 우리 답사꾼들이 각별히 주목해야 할 곳은 대청(臺廳)이다. 왜냐하면 간관(諫官)들이 임금에게 국정에 대한 시시비비를 간언(諫言)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조선 정치의 저변에는 간관(諫官)과 사관(史官)이라는 언로장치(言路裝置)가 있어 왕권(王權)과 신권(臣權) 간에 수시로 견제 원리가 작동토록 되어있었다.
바로 그 핵심적인 접점(接點)이 사헌부와 사간원의 간원들이었는데 임금이 정승·판서들을 불러 모아 어전회의를 할 때마다 배석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대청은 삼정승(三政丞)이 머무는 빈청(賓廳) 옆에 있다. 그렇다면 실제로 대청 간원들은 무슨 간쟁(諫爭)을 하였을까?
여기서 잠시 조선왕조실록을 뒤져 쓴 소리 몇 가지를 알아볼 터이다.
첫째로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해 그러니까 1592년(선조25년 9월 20일) 간원들은 황주 목사를 파직하도록 상소했다.
사간원에서 선조께 아뢰기를 “예조참의(禮曹參議) 민인백은 전에 황주목사로 있을 적에 성(城)을 버리고 달아나… 싸움터에 나가지도 않고… 그런데도 죄(罪)는 가하지 않고 본직(本職)을 제수하였습니다… 그대로 백의종군 할 것을 명하소서”라고 아뢰자 “그 일은 아뢴 대로 하라”고 명하였다.
사실 당시는 바로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온통 누란(累卵)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다. 그런 상황에 어찌 지방 목사가 싸울 방책(防柵)은 도모하지 아니하고 도망을 갔다는 말인가!
정말 비겁한 벼슬아치다.
하여간 한국의 역사 소설가들은 작품의 극적효과를 노리기 위해 종종 수령파직(守令罷職)이나 유배사건(流配事件)을 소재로 삼곤 한다. 그러나 때때로 간원들의 간쟁은 정승·판서까지 낙마(落馬)를 시키기 때문에 하늘을 찌를 지경이다.
태종 1년(1401년) 9월 21일 대사헌 이원은 야간 통행금지 시간을 어겼다고 파직을 당했다.
사간원이 상소하기를 “대사헌 이원은 직책이 풍기의 우두머리에 있으므로… 금월 16일에 범야(犯夜)하여 행하다가 순관(巡官) 윤종에게 욕을 당하기까지 하였고 호군(護軍) 윤종은 순관으로서 이미 범야한 사람을 보았으니 마땅히 가두어 놓고 계문(啓聞)을 했어야 할 텐데… 다만 그의 종(從)근수만을 잡았다가 이내 놓아 주었으니 사(私)를 따르고 법(法)을 무시한 것입니다. 원컨대 두 신하를 파직시키어…”라고 아뢰자 태종은 그대로 윤허(允許)한 것이다.
대사헌(大司憲)하면 사헌부의 우두머리가 아니던가?
오늘날 선진 민주국가들은 자기나라의 정치제도가 발달했다고 유세(有勢)를 떨고 있지만 아마 그러한 간쟁 장치는 보기 드물 거다.
더욱이 그런 간쟁의 대상은 왕과 그 종실(宗室)까지 미치는 지라 권력의 전횡을 막고 친인척까지 감시하였다고 하니 정말 놀랍다.
여태껏 간관정치(諫官政治)에 대한 학습을 마쳤으니 기왕에 이쯤에서 사관제도(史官制度)를 공부하는 것이 좋겠다.
그러면 도대체 사관정치(史官政治)란 무엇이더냐?
“한마디로 사관(史官)은 조선왕조실록을 편찬하는 실록청(實錄廳) 관리 이지요… 그들은 전 임금이 즉위 할 때부터 퇴위 할 때까지 왕의 모든 행적(行蹟)을 기록하지요… 그 편찬 작업은 왕이 재직 중에 이뤄지는 게 아니고… 후왕이 실록청(實錄廳)을 개청하면서부터 이뤄지지요.”
“실록은 조선 태조부터 조선 철종까지 25대 472년(1382-1863)간에 걸쳐 편년체(編年體)로 기록되었어요… 묘향산, 태백산, 정족산(1678년 강화 마니산에서 이전), 적상산, 오대산 사고에 총 1893권 888책으로 보관돼 있어요… 임진왜란, 병자호란 때 소실되어 현재 남은 것은 총 2077권이지요.”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의 역사코드는 무엇보다 그 편찬 사업의 공정성(公正性)에 맞춰줘야 한다.
사관(史官)들은 실록(實錄)을 편찬하는 일에 절대적으로 어떠한 권세가(權勢家) 한테도 간섭을 받지 아니하고 비밀까지 보장이 된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열람하고 그 사초(史草)를 파괴한 군주가 딱 한 분이 있었는데 그가 연산군이다. 그 당시 연산군은 그 사관들에게 큰 화(禍)를 미쳤는데 그게 무오사화(戊午士禍)이다.
“1498년 7월 그러니까 연산군 4년째 이지요… 춘추관(春秋館)에서는 성종실록을 편찬하기 위해 실록청을 열었어요… 당대는 훈구파와 사림파 간에 대립하고 있었어요.”
그 당시 사림파 출신 사관 김일손이 훈구파의 거두 이극돈을 사초(史草)에서 이렇게 맹비난을 하고나서 그 사화사건(士禍事件)이 확대되기 시작한 거다.
‘이극돈은 어찌 유교를 신봉하지 아니하고 불경을 외웠는가? 국상(國喪) 중에 관기를 불러 놀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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