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에서 만난 사람(上)

한나라당 진 영 의원

시민일보

| 2006-12-14 19:22:54

나의 강화도 나들이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데, 그것은 고등학교 시절의 잔영이 남겨놓은 흔적이기도 하다. 이러한 강화도와 나의 인연은 결국 평생토록 내가 강화도를 찾게 되는, 이른바 ‘내 삶의 순례지’와 맞닿아 있다.

강화도를 ‘내 삶의 순례지’라고 말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지금도 강화도를 찾는 이유는 단지 서울 도심의 혼잡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그곳에서 나는 내 자신의 본 모습을 만나보고 싶었고, 나의 미래도 찾아보고 싶었다. 그곳에 가야만 그런 일이 이루어질 것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서울의 일상이 가져다주는 무료함을 느끼거나 정신적 피곤이 찾아오면 나는 강화도에 간다. 고등학교 시절 가보았던 초지진이나 광성보도 찾아보고 정족산성도 오르면서 끝내는 고등학교 때 내가 서 있었던 그 자리로 되돌아와서 황해 바다를 바라보는 것이다. 물론 하늘 저편에서 몰려오는 구름 떼를 보면서, 바람 소리에 섞여 오는 함성에 한동안 넋을 잃은 채 그렇게 서 있다가 발길을 되돌리는 식으로 ‘내 삶의 순례지’인 강화도와의 관계를 이어간다.

나는 강화도에 가면 꼭 만나는 사람이 있다. 양헌수(梁憲洙) 장군, 바로 그 어른이시다. 역사의 인물이지만 나는 그 어른을 만나러 가는 것처럼 그렇게 강화도 가는 길을 서둘게 된다. 처음 양헌수 장군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 그곳의 어느 안내판에 기록된 양헌수 장군에 대한 이야기가 내 마음을 끌었다. ‘병인양요에서 강화를 침탈한 프랑스의 올리비에 부대를 격퇴시킨 용장’으로 기록된 그 글이 내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나는 양헌수 장군에 대한 기록을 찾았다. ‘양헌수 장군은 어떤 분이셨을까?’ 서양의 침탈군이 몰려오면 으레 겁먹고 도망치기에 바빴던 그 시절, 서양 총포의 화력에 혼비백산했던 백성들의 혼돈만이 되풀이되었던 그 절박한 상황에서도 ‘서양의 적들을 맞아서’ 당당하게 일격을 가함으로써 그들을 물리칠 수 있었던 장군의 참 모습에 대해서 알고 싶었다.

진단학회에서 편집하고 이선근 선생이 집필한 ‘한국사’의 근세 후기편(을유문화사)에는 양헌수 장군을 이렇게 적어놓았다.


프랑스 수사제독 ‘로즈’에 명하여 군함 3척을 보내어 한강을 탐험하게 하고 1866년 10월에 다시 군함 7척에 육전대 600인을 태워 선교사 학살의 죄를 물었다. 대원군은 곧 8도에 격을 전하여 군병을 징발하게 하고 순무영을 두어 이경하를 순무사로 삼아 서울에 유진케 하고 양헌수·어재연을 각기 좌우선봉, 한성근·이장렴을 각각 유격장군으로 삼았다. 이에 양헌수는 병 200을 이끌고 통진강을 건너 통진 문수산성에 포진하고, 어재연은 병 200을 이끌고 김포강을 건너 강화도 광성에 포진하였으며….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양헌수 장군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정족산성 수성장(鼎足山城守城將) 양헌수(梁憲洙)가 보내온 보고에 의하면 이러합니다.

이달 초하룻날 저놈들 60여 명이 이 산성에 들어와 지형을 자세히 살피고는 가장 집물들만 파괴하고 가버렸는데, 그날 밤에 우리 군사가 몰래 들어가는 것을 저놈들은 사실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오늘 특별히 지키고 있는 성을 점령할 계책으로 저들의 두령이 말을 타고 나귀를 끌고서 짐바리와 술과 음식을 가지고 와서 동문과 남문 양쪽 문으로 나누어 들어오는 것을 우리 군사들이 좌우에 매복하여 있다가 일제히 총탄을 퍼부었습니다. 저들이 죽은 것은 6명이고 아군이 죽은 것은 1명입니다. 적들은 도망쳐 가면서 짐바리와 술, 음식, 무기 등을 모두 버리고 갔기 때문에 거두어 보관해 두고 있는데 훗날 자세히 조사하고 기록하여 보고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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