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에서 만난 사람(下)
한나라당 진 영 의원
시민일보
| 2006-12-17 17:49:41
그리고 이어 그 다음날의 기록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어제 패배한 적들이 오늘 틀림없이 기승을 부리며 발광할 수 있기 때문에 더욱더 엄하게 경계를 세우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제 싸움에서 죽은 사람은 포수(砲手)인 양근(楊根) 사람 윤흥길(尹興吉)이며, 부상당한 사람으로서 선두보 별장(船頭堡別將) 김성표(金聲豹)와 홍천(洪川) 사람인 이방원(李邦元), 춘천(春川) 사람인 이장성(李長成)은 모두 죽는가 사는가 하는 갈림길에 처해 있습니다.
유격장(遊擊將) 최경선(崔經善)과 홍석두(洪錫斗)는 평안도 포수 93명을 거느리고, 병조 좌랑 한성근(韓聖根)은 황해도 포수 50명을 거느리고 무사히 진에 도착함으로써 약간이나마 군사들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있습니다만 아직도 적과의 역량 관계를 대비하면 부족한 근심이 있습니다. 어제 노획한 물건들은 일일이 별지 문건에다 기록하여 원물건들과 함께 올려보냈습니다. 그리고 어제 전투 때에 6명의 적들이 남문 밖에서 죽은 것을 우리 군사들이 목격하였습니다. 어젯밤 촌민(村民)들이 와서 말하기를, “저놈들이 행군하면서 또한 죽은 자가 40여 명이나 되었는데 저놈들이 모두 시체를 묶어서 여러 대의 짐바리에 실어갔다”고 하였습니다. 저놈들이 죽은 수는 50여 명입니다.
서양 세계의 큰 변화에 대비하지 못한 위정자들의 무능력 탓으로 그 당시 우리 백성들이 당한 고초는 글로 표현하기조차 어려웠을 것이다. 강화도의 백성들을 돌보아주도록 명한 고종의 하교를 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강화도에 갈 때마다 서구 제국주의의 침탈전으로서 프랑스 함대의 침범이 벌어졌던 병인양요의 그 현장에 서서 힘없고 가난한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려고 온몸을 던져 싸웠던 양헌수 장군의 기백을 떠올리며 경건한 마음으로 그분의 헌신에 감사했다.
양헌수 장군은 그 뒤 황해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1873년에는 어영대장이 되었으며, 1876년 강화도조약 당시에는 김병학 등과 함께 개국을 반대하는 척사론을 주장했다. 1884년에는 공조판서의 자리에 올랐다.
1860년대, 그 시절만 해도 서구 제국주의가 아시아 지역을 유린했던 절정의 시기였다. 그들의 군사작전에 맞서서, 그것도 근대적인 군사무기로 무장된 프랑스의 군병들에게 단지 활과 창, 기껏해야 형식에 불과했던 포대 등으로 맞서야 했던 조선 병사들은 겁부터 집어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에 프랑스군이 쳐들어오자 상당수의 병사들은 도망가기에 바빴다. 저들의 노략질이 심화되었고 백성들의 피 흘림은 고통으로 가중되었지만, 이를 막아줄 아무것도 없었던 바로 그때 양헌수 장군의 병사가 프랑스군을 격퇴시켰다는 것은 하나의 기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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